@킬리만자로
우리나라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직항 노선은 딱 하나 있다. 바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이다. 어디를 가든 아프리카 교통의 중심지인 이 도시를 거쳐야 한다. 아디스아바바행 비행기에는 한국인 승객이 거의 없다. 아직 아프리카 여행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이목을 끄는 무리가 있다. 엄마 아빠뻘, 혹은 그 이상의 연배인 트레킹 족이다. 살구빛 미소를 머금으신 어머님이 내 옆자리에 앉으신다. 11시간 비행을 함께 할 낯선 동지이다.
- 어디 가세요?
- 킬리만자로 산을 등반하러 가요.
- 같이 오신 분들도요?
- 건너 자리 양반은 안지 꽤 됐는데 작년에 보름 동안 히말라야를 함께 올랐어요.
- 힘들지 않으세요?
- 우리나라 산 타는 거랑 또 달라요. 한국에서 등산 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단시간에 빨리 오르는 것보다 천천히 자기 호흡으로 걷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욕심내지 않으면 어렵지 않아요.
킬리만자로, 히말라야라니. 청춘의 한가운데를 거닐고 있는 나에게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쉽지 않은 도전이다. 히말라야와 킬리만자로는 완주하는데 수일이 걸린다. 더욱이 해발 오천 미터를 넘나들면 필연적으로 고산병이 찾아온다. 지난 남미 여행에서 3400미터 위에 세워진 고산도시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가슴의 갑갑함과 핑 도는 어지러움을 경험했다. 물건을 들기만 해도 한참 쉬어야 하고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조심조심 걸음을 늦추었다. 그런데 20킬로가 넘는 배낭을 짊어진 채 정상까지 오르다니, 분명 고된 일정과 체력의 한계에 부닥칠 것이다. 기쁨을 맛보기 전 겪어야 할 고난의 무게를 알면서도 나아가는 용기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한편으로는 그 해법이 너무나도 간단해 웃음이 나온다. 자기 페이스를 지킨다. 이 단순한 원리를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그들의 목표는 끝까지 해내는 데 있지, 빠른 시간 내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 원래 트레킹을 좋아하셨어요?
- 사실 얼마 안 됐어요. 오십이 넘어서 시작했죠. 여기 대부분이 그래요.
-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 그전까지는 내가 무얼 하면 행복한지 몰랐어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그러다 중국에서 처음 산을 타게 되었는데 이거다 싶었죠. 숨이 차 죽겠다 싶다가도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기분을 못 잊으니까. 그래서 선언했어요. 지금부터 하겠다고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단출하게 정체성이라 부르는 고민은 젊음의 특권이라 믿었다. 하지만 반평생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내려놓은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도 같은 응어리를 품고 계셨다. 뒤늦은 깨달음의 크기만큼 연신 고개가 끄덕여진다. 끝없는 응원과 지지를 전하고 싶다. 아마 모르실 테지.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꾸려나가시는 모습이 청년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위로가 되는지를.
- 트레킹을 하면서 어떤 점이 바뀌셨어요?
- 나에게 집중하게 되었어요. 오래 걸으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묵묵히 한 걸음씩 디뎌야 해요. 지금 여기에만 몰두하게 되죠. 그럴 때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게 느껴져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요.
- 역할에 메이지 않고 순간을 사시는군요. 건강한 마음이네요. 현재에 중심을 두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행복해 보이세요.
- 정말 행복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버텨주는 발에게 고맙고, 스틱을 쥐는 손에게 고맙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심장에게 고마워요.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해요.
어머님의 말씀 한 마디마다 진심 어린 고마움과 행복이 묻어 나와 그 감정에 전염된다. 괜스레 눈가가 붉어지고 코가 시큰해지고 가슴이 따땃해진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은 어쩌면 순간을 사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일상은 낱낱의 오늘이 모여 이루어지고 하루하루의 누적은 나를 만들어간다.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매 장면을 귀하게 여기고 몰입해야 마땅하듯이 지금에 충실한 삶의 자세는 나를 채우는 조각들을 발견하고 소중히 대하게 한다.
어머님만큼의 세월을 보내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스스로를 알고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싣고 삶의 가치를 맛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멋지게 나이 든다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아프리카행 비행기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찾아야 할 풀이를 던져준 듯하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이 한 달을 온몸과 마음으로 부딪치자.
킬리만자로에서 어머님 아버님들과 헤어지며 서로를 격려한다. 아버님들께서는 나를 보시며 ‘여행은 젊어서 해야 해’ 그리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보다 어머님 아버님들이 훨씬 젊어 보여요. 청년의 때에만 젊음의 시기를 누린다는 인식은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이 청춘(靑春)이면 그게 진정한 쪽빛 봄이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