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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잔지바르를 결성하다

@잔지바르, 탄자니아

by 지수




거리에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쏟아진다. 흰색 반팔 셔츠에 파란 원색 바지를 입은 소년들과 동일한 색상의 하얀 히잡과 파랑 치마를 두른 소녀들이 부두 앞으로 달려간다. 상체를 깊게 숙여 물속을 들여다본다. 무슨 내기라도 한 걸까? 재미난 게 있나 살펴보지만 특별할 건 없다. 도심의 항구임에도 바닥의 자갈과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가 선명하게 비칠 만큼 맑은 걸 제외하면 말이다. 시가지 스톤타운을 벗어나자 울퉁불퉁한 흙길이 이어지고 양옆으로 열대의 삼림이 높이를 달리하며 뻗어있다.

- 잎이 크고 넙적한 게 바나나예요. 그 위로 기둥이 쭉 올라간 녀석이 코코넛이죠. 꼭대기에 달린 열매 보여요?

학다리 야자 앞에서는 튼실한 바나나 나무도 땅꼬마가 된다. 얇고 기다란 몸통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어 있는데 어떻게 저 무거운 코코넛을 지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황톳빛 작은 마을들을 지나 한 시간을 꼬박 달리니 잔지바르 북부의 해변 능귀(Nungwi)에 도착한다.


다이빙 센터 근처의 코코아 하우스에서 다섯 밤을 보내기로 한다. 유준이와 예찬이도 같은 곳에 머문다. 코코아 삼 남매의 탄생이다. 짐을 풀고 세희 언니네를 만나러 간다. 능귀의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광장은 푸석푸석한 흙먼지가 날린다. 네 모서리에는 전통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환전소, 기념품 가게와 슈퍼마켓이 있다. 거리에는 바짝 마른 소들이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어슬렁거린다. 틈바구니 속 중앙 공터는 하교를 한 마을 아이들이 공을 차는 독무대이다. 하얀색 잔지바르 유니폼을 입은 낯선 사람이 걸어온다. 세희 언니네 숙소 주인 무디라고 한다. 그는 선뜻 우리에게 능귀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광장 모퉁이의 문을 밀치자 파라솔 너머 눈부신 해안이 펼쳐진다. 새하얀 모래와 옥빛 물살이 어우러져 가히 지상 낙원이라 불릴 만하다.


평화로운 능귀의 오후


달달한 젤라또를 입에 물고 능귀의 바다를 하염없이 맛본다. 러시안블루의 푸른 눈동자를 닮은 물결은 질리는 기색 없이 감탄을 자아낸다. 파도를 타고 사공들이 노를 젓는다. 패들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는가 하면 힘을 합쳐 카야킹을 한다. 몸이 근질근질해 근처의 대여점을 들른다. 바가지 쓰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장님과 말을 트다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 한국이라고? 나 한국 드라마 광팬이야. 주몽이랑 장보고가 내 인생 드라마야.

잔지바르에도 한류 열풍이 부나 보다. 방송국에서 종종 한국 드라마를 송출하는데 인기 만점이란다. 어쩐지 코리안이라고 답하면 다들 사랑스럽게 대해주더라.

- 진짜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는데! 이거 알지? 장금아~

어떤 드라마를 줄기차게 설명하는데 우리말 발음이 어려운지 제목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러다 ‘장금아~’ 한 방에 정답을 산출한다. 어릴 적 나도 즐겨봤던지라 제대로 통한다. 사장님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팬심을 공유한다. 대장금 DC도 받는다. 처음 가격보다 할인이 되고 1인용 카약이 2인용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능귀에 다시 오면 한복을 선물하기로 약속한다.


현재 탄자니아는 한겨울을 지나고 있지만 능귀의 수온은 28도로 물놀이 하기에 딱 맞다. 난생처음 타보는 패들보드인지라 친구들이 앞뒤로 단단히 지탱한다. 먼저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누르며 평형을 유지한다. 무게 중심을 찾으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노를 젓는다. 다들 곧잘 하는데 막내 준민이는 아까부터 계속 물을 먹고 있다. 속도가 잘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쭉쭉 뻗어 나간다. 신나게 물살을 밀어내니 경계선이 코앞이다. 추진력을 받은 보드는 멈출 생각이 없다. 아래를 보니 수심이 꽤 되어 보인다. 당황하면 넘어진다. 마음을 다잡고 크게 원을 그리며 반대 방향으로 튼다. 돌아가긴 하겠지만 빠지는 것보단 낫다. 복작이는 리조트 건너편에는 현지인들이 고기잡이 그물을 정리하고 있다. 갑자기 흘러든 여행자의 보드를 밀어준다. 노를 머리 위로 흔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잔잔한 파도는 노를 젓기에 최적이다.


얕은 물가로 돌아와 카약으로 건너 탄다. 길쭉한 바나나 모양의 노란 보트는 훨씬 안정감이 있다. 좌우로 번갈아 저으며 먼바다로 항해한다. 수면에 어른거리는 태양빛이 번지기 시작한다. 선상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가슴 한 군데를 툭 건드리는 힘이 있다. 황홀한 평온함에 마음이 묵직하게 따끈해진다. 갑작스레 잔지바르 꼬마가 카약까지 헤엄쳐와 얼굴만 쏙 빼낸다. 눈빛을 읽고 뒷자리에 태운다. 가슴팍까지 오는 소년에게 키의 두 배쯤 되는 노는 자유롭게 다루기 어려운 도구이다. 다리를 뻗고 앉으면 영 힘이 실리지 않는지 결국 무릎을 꿇고 윗몸을 세워 체중을 싣는다.

- 무작정 빨리 저으려고 조바심을 내면 오히려 배가 안나가. 누나가 구호를 외칠 테니까 따라 해 봐!

ONE, TWO, ONE, TWO. 박자대로 손발을 맞추니 우리의 호흡은 백 점 만점이다. 어린아이의 고향은 찬란한 바닷가이지만 여행자를 위한 보트는 쉬이 닿지 않는 장난감이다. 꼬마가 흠칫 어깨를 움츠리더니 물속으로 뛰어든다. 모래사장에는 화가 잔뜩 난 엄마가 물 밖으로 나올 때까지 소리치고 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서며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한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놀이터에서 뛰놀던 나를 베란다 창문 너머에서 큰 목소리로 부르던 엄마가 겹쳐 보인다.




뭍에는 높게 그물을 치고 비치발리볼을 하는 무리와 해변 축구에 몰두한 젊은이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무디와 원석 오빠, 유준이와 예찬이도 한데 어우러져 신나는 한 판을 즐기는 중이다.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데 패셔니스타 마사이족이 말을 붙인다. 어깨를 감싸는 망토 원피스 형태의 전통 옷에는 빨강과 검정이 어우러진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마을에서 손수 제작한 팔찌와 발찌도 여러 겹 차고 있다. 거기에 머리를 땋고 형광 초록색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이질감 없이 세련되고 힙(hip)하다. 마사이족은 들목에서 살갑게 손을 마주 잡는 마사이식 인사를 하며 사람들과 얼굴을 튼다. 그러다 어느 정도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면 마사이 시장으로 초대한다. 상대의 부담을 낮추면서도 적극적인 호객행위라 하겠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벌써 내 이름을 외웠다. 나라별 팔찌를 수집하는 준민이와 함께 마사이 친구를 뒤따라간다.


금방이라더니 해변 몇 구역을 지났는지 모르겠다. 사기 아니냐며 위급 시 도망칠 비상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끝자락에 시장 간판이 보인다. 칸칸이 나누어진 소규모 가게들은 취급하는 물품이 비슷하다. 깊숙한 구석에 위치한 친구의 점포에는 한 땀 한 땀 엮어 만든 수제 목걸이와 팔찌가 진열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몇몇을 꺼내 이리저리 뜯어본다. 분홍과 보라가 교차하는 끈에 오백 원짜리 크기의 동그란 문양이 있는 목걸이를 고른다. 준민이는 탄자니아스러운 팔찌 두 개를 찜한다.

- 각각 10실링이니까 30실링에 해줄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준민이는 마사이 친구의 나무 지팡이로 바닥에 숫자를 그린다. 25에 손사래를 친다. 그럼 9실링씩 해서 27에 하자니 순순히 하겠단다. 개구진 표정을 보며 성공적인 거래에 실패했음을 확신한다. 다시 26을 이야기하자 마사이 친구는 지팡이로 28을 쓴다. 처음보다 가격이 올라갔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다가 결국 27에 합의를 본다. 흥정 왕 세희 언니를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저녁이면 해변 곳곳에서 공연이 벌어진다.


단골 식당 랑기랑기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잔지바르 춤꾼들이 스트리트 댄스를 선보인다. 명순 언니는 진작에 명당자리를 선점해 그들의 춤사위를 촬영 중이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비트에 맞추어 화려한 스텝을 밟고 돌아가며 아찔한 비보잉 동작을 해낸다. 역광이라 그들의 표정과 생김새는 보이지 않지만 빛을 받은 검정색 실루엣은 몸의 탄력과 유려한 선을 더욱 부각시킨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행자와 현지인을 가리지 않고 다들 아디다스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나도 사야겠다. 광장의 가게에서 유사한 티셔츠를 발견한다. 이럴 때는 무디가 최고다. 주인장이 가격을 세게 불렀는지 무디는 곤란한 표정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 탄자니아 본토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섬으로 들인 거라 가격이 좀 비싸긴 해. 최대한 합의했는데 어때?

뭔들 어떠랴. 나는 파란색, 명순 언니는 하늘색, 세희 언니는 보라색을 선택한다. 티셔츠 로고는 탄자니아가 아니라 잔지바르이다. 소재도, 색깔도, 어깨에 포인트로 들어간 세 줄짜리 선도 다 맘에 든다.


무디네 테라스에서 촬영을 한다. 아디다스 광고를 패러디하려고 신발끈을 묶는가 하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다소 건방진 자세를 취해 본다. 막내 준민이도 합류한다. 팔짱을 낀 채로 등을 맞대다가 셔츠의 윗부분을 집어 소속을 강조한다. 그러다 종목이 변질된다. 킥복싱 꿈나무는 불쌍한 어린양에게 플라잉 니킥을 꽂는다. 빈 틈 없이 적중한다. 이번엔 장풍이다. 단전에서 기를 끌어모아 발사하자 준민이가 저 멀리 날아간다. 포토그래퍼 유준이는 사진을 확인하더니 NG를 많이 내는 막둥이에게 한숨을 쉬며 혼낸다.

- 동생! 니 지금 장난하나?

중독성 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지르는 호통에 웃음 폭탄이 터진다. 말투가 귀에 콱 박혀 따라 하게 된다. 여행 내내 유준이 성대모사에 심혈을 기울인다. 역시 마지막은 단체 사진이다. 첫 줄 센터에서 무디가 중심을 잡고 양옆으로 원석 오빠와 준민이가 무릎을 구부린다. 뒷줄에는 나와 명순 언니, 세희 언니가 팔짱을 끼고 렌즈를 노려본다. 눈빛과 자세가 흠잡을 데 없다. 프리미어리그도 저리 가라다. 팀 잔지바르의 결성이다. 아디다스에서 연락 올 날만 기다린다.


팀 잔지바르 멤버들과 찍은 콘셉트 사진


한적한 능귀의 밤하늘에 두 줄기 노란 형광빛이 솟아오른다. 무디는 오늘 파티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일곱 명 모두 팀 잔지바르 유니폼을 갖춰 입고 입성한다.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클럽에는 아프리칸 그루브가 폭발하고 있다. 마사이 형님들이 선글라스에 전통 의상을 입고 무대를 휩쓸자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원석 오빠는 마사이 댄스를 전수받아 이미 이 세상 흥이 아니다. 열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유준이와 디제이를 찾아가 선곡을 부탁한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분명 우리말 가사인데 다들 흥얼거리며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춘다. 후렴이 나오자 모두 한 템포 쉬었다가 소리친다.

- 오빤 강남스타일!

여행의 시작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팀 잔지바르 멤버들이 있었기에 아프리카 여행의 출발선을 유쾌하게 끊을 수 있었다. 애정 하는 잔지바르의 빛나는 추억들이 장면 가득 이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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