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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n 28. 2019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나의 오늘과 다가올 내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 <랩 걸>, 호프 자런



소싯적 꿈을 명확하게 그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흰 도화지 위에 무엇을 그릴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4B연필로 연하게 윤곽을 스케치해내는 정도였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선명하게 미래를 투영하기에는 지식도 경험도 부족했다. 그저 '진 무엇'이 돼있으리라 상상하곤 했다.




나의 십 대는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수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중간, 기말 시험에서 성적표에 적힌 점수와 등수는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세상에는 소위 말하는 잘나고 똑똑한 아이들이 많구나, 내가 쌓아온 스펙은 참 보잘 것 없구나 절망하곤 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재능뿐만 아니라 정보와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포부는 삶 전반에 대한 고민 없이 만들어진 일차원적인 이름표였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 스스로를 증명해줄 대학교와 학과처럼 모두가 탐내는 이름값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타이틀을 얻고 난 이후 어떤 길을 걷고 싶은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와 생각하지 못했다의 어느 즈음이었는데 비겁한 변명처럼 들려도 어쩔 도리가 없다. 대학의 수시 면접 포트폴리오를 준비면서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멋지게 포장하려 애쓰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중 실제로 하지 않았던 일과 의뭉스러운 답변이 뒤섞여 낯선 나를 빚어냈다. 면접관이 허점을 슬쩍 찌르자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불성실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열아홉 소녀는 부푼 열망에 걸맞지 않은 멋쩍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입학식 단상을 바라보던 손에는 열둘의 내가 바라던 대학의 합격증을 쥐고 있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법한 일을 시작했던 스물넷은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던 직장에서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치열하게 이루어낸 결실을 다른 사람의 결과물과 비교하며 작아지기도, 누군가의 성취를 보며 무작정 따라 하기도 했다. 그런대로 만족하며 지내다가도 고대하던 '멋진 무엇'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라함을 느끼던 나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원하는 게 무어냐 물으면 부끄럽게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멋진 무엇'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은 어쩌면 능력과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구할 무엇'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순간 빨간 불이 켜진 횡단보도의 중간에 자리한 듯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서있을 수도 없었다.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보였다. 바라던 지향이 아니더라도 나의 삶은 사랑받기 마땅하다는 것을. 무엇을 이루었기에 사랑받는 삶이 아니었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방향을 결정할 키를 쥐고 있고, 내 안에는 더 멀리 나아갈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다. 성장을 멈추기에는 나의 뿌리와 이파리가 너무나도 싱싱하다. 나의 오늘과 다가올 내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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