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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n 25. 2019

다리는 공간을 쪼갠다

물길 따라 성북천 걷기


안암교에서 만나


세 걸음 남짓한 계단 너비를 촘촘히 채운다. 2~3분 단위로 낯선 얼굴들이 밀려 올라온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부지런히 표정을 읽는다. 오늘 나는 어디에서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가. “종각역 1번 출구에서 보자.” 지하철 몇 번 출구 앞은 가장 흔한 약속 장소의 지표가 되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처럼 이름난 건물이라든지, 늦은 저녁을 함께할 식당, 혹은 가까운 이들에게는 그들만이 ‘아, 거기!’하고 알아챌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정감 어린 장소도 좋지만 나를 들뜨게 하는 이름은 따로 있다.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교, 맑은 내 다리, 영도교, 비우당교, 안암교, 물빛다리. 널찍한 몸집의 서울에 12m가량의 기다란 몸체를 누인 다리 말이다.


그 옛날 조선시대에 시전을 찾아 바삐 한양의 뒷골목을 누비던 청계천부터 북으로 물길을 내 새끼 친 성북천까지의 물줄기는 내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하는 길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쓰고는 뛰는 듯 걷는 듯 애매한 걸음걸이로 달짝지근한 카페를 찾아 나선다. 바람과 햇살이 좋은 날이면 끝을 정해두지 않고 걸어 내려가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 길을 되돌아 훑는다. 뜨거운 열기가 들끓는 밤이면 광장에는 낮이며 밤이며 분수가 솟아오른다.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를 들으며 물길을 막아선 바둑판 모양의 돌을 성큼성큼 밟아 물살을 가로지른다. 맥주 한 캔을 딱 비우고 대기보다 온도가 낮은 물의 흐름에 발을 오래도록 담근다. 건조한 돌바닥에 발을 얹어 자연스레 물기가 걷히면 다시 신발을 고쳐 맨다. 가을이 완연한 저녁이면 어둑한 시야에 숨이 들어찰 때까지 달린다. 다가오는 묵직한 일렁임에 뒤돌아보는 사람을 곁눈 짓으로 읽는다.


다리 아래에서 버스킹 공연을 보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켠다.


청계천과 성북천은 물살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뚜렷한 개성이 있다. 두 천의 경계인 성북천교에서 성북천으로 꺾어 드는 순간 물길이 좁아진다. 수로의 폭, 물의 양, 발바닥에서 무릎으로 차오르는 깊이뿐만이 아니다. 마치 강의 본류에서 지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같은 모태임에도 다른 내음과 소리로 전이되듯이 풍경의 온도가 달라진다. 아무래도 청계천의 인상은 도심에 가깝다. 고층빌딩 숲 사이를 구르는 차량의 덩치와 빠른 호흡이 그러하다. 걷는 사람의 색채도 선명하다. 어느새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청계천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짧은 식사시간을 활용해 기분전환 겸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도 있다. 퇴근 후, 혹은 주말이면 데이트하러 나온 연인과 가족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성북천은 지극히 사적이다. 그 지역에 뿌리내린 동네 주민의 친밀한 삶의 공간으로 그들의 일상을 엿보기에 제격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북천을 오래도록 걸으면서 내 나름대로 그 길을 조각내 보았다. 산술적으로 길이를 나눈 것이 아니라 걷는 이의 경험과 감정을 한껏 실은 구분이다. 첫째는 청계천과 성북천의 경계인 성북천교에서 안암 2교까지, 둘째는 안암 2교에서 성북 3교까지, 마지막으로 성북 3교에서 성북천의 끝인 분수광장까지가 그 기준점이다. 성북천의 입구, 위압적인 붉은 교각 아래에서 안암 2교까지는 약간의 긴장이 감돈다. 대로변에서 작은 샛길로 들어서면 느끼는 이질감을 질경이며 씹는다. 1차선이라 길이 좁기도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도시에서 마을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한다. 사실 동네의 안방마님들도 많지 않다. 때론 으스스하기도 하고 까닭 모를 쓸쓸함에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외로이 걷다 천 너머 울리는 자전거 벨소리에 문득 ‘혼자가 아니야’하는 인사치레는 아닌지 갸웃거린다.


청계천과 성북천의 경계인 붉은 교각과 성북구와 동대문구를 나누는 안암 2교


안암 2교에서 성북천은 커다랗게 커브를 돈다.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다. 다리는 공간을 둘로 쪼갠다. 굵은 교각의 짙은 그림자는 터널을 연상시킨다. 앨리스의 토끼굴을 빠져나온 양 뒤바뀐 모양새에 괜스레 주위를 더듬게 된다. 1차선 길은 체구를 두 배로 부풀려 2차선이 되고, 불어난 길의 부피만큼 사람들의 왕래도 늘어난다. 어스름에 젖은 사위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양(陽)의 공간으로의 입성을 반긴다. 물리적으로도 그러하다. 안암 2교를 기점으로 남쪽은 동대문구, 북쪽은 성북구로 나뉜다. 맞닿아있는 두 행정구역의 경계를 피부로 느끼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성북 3교부터는 다리의 세상이다. 다리의 이름은 각각이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북 3교 이전의 끝말에는 대부분 ‘교’가 붙는다. 이에 반해 성북 3교에서 마지막 분수광장까지는 ‘다리’로 끝맺는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 교(橋)와 다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橋)는 필요의 산물이다. 나이가 지긋하고 골격이 단단하다. 뚱뚱한 대형버스에게도 등을 내준다. 교량은 도시가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돕는 부속품의 성격을 띤다. 반면, 다리는 쓸모에 가깝다.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은 없지만 소답한 일상의 발걸음을 채운다. 그래서 다리는 머리가 닿을 듯 키가 작고 조금 엉성하다. 낮은 지붕과 값싸 보이는 재료와 소소한 꾸밈이지만 마음은 다리 쪽으로 기운다. 구불구불 둥글게 난 물길과 양 옆으로 난 좁은 산책로를 걸을 때면 그늘과 빛줄기가 번갈아 교차하는 따스함에 미소 짓는다. 오늘도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주민들의 친숙한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성북천의 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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