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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11. 2021

검은 물살을 헤치면 쪽빛 반짝임을 만날 거야

@와이토모, 뉴질랜드



 밤이 아닌 어둠 속에서 반짝임을 만난다면 그곳은 분명 와이토모일 거야.



 태양이 지배하는 때에는 강렬한 빛마저 그 힘에 압도당해 본연의 또렷함을 잃기 마련이다. 작고 신비로운 발산은 어스름이 내리고서야 잠잠히 존재를 드러낸다. 밤하늘의 별처럼 풀숲의 반딧불이처럼 말이다. 요정의 숨결이 깃든 마을에는 대낮에도 영롱한 빛의 조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의 펜던트를 밝히던 불빛은 거기에서 온 걸까?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이름을 되뇌며 상상의 진폭을 넓힌다. 오클랜드에서 2시간 거리에는 '와이토모'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버스정류장이 없어 이차선 도로 한편에 짐을 내린다. 연둣빛 인터시티 버스가 저 너머로 몸을 감추자 짙은 녹음이 밀도를 높여온다.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시골 동네가 뉴질랜드의 얼굴마담이라는 걸 누가 믿을까? 읍내에는 마트가 없어 장을 보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뚜벅이 여행자는 자연스레 길가에 자리한 식당으로 흘러 들어간다. 높은 천장과 탁 트인 내부는 감각적으로 꾸며져 있다. 가로로 기다란 실내 곳곳에는 커다란 오크 통으로 만든 테이블과 원목 의자가 놓여 있다. 중앙에는 스크린 속 테니스 경기를 배경으로 당구대가 자리하고 벽면 게시판에는 투어 업체를 소개하는 전단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주문을 받는 바에서 재미난 문구가 눈에 띈다.

동굴 투어를 가기 전에 식사를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바쁠 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보통은 20분 정도 걸리지만요.

느릿하게 흐르는 와이토모의 오후 나절에 금세 발을 맞춘다. 야외 테이블 위에 팔을 괸 채 먼 풍경을 바라본다. 그제야 뉴질랜드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희고 긴 구름의 나라.


한적한 시골 마을 와이토모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며 오후를 보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도로변을 따라 걷는다. 제대로 된 인도가 없어 이동하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을 맞으며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가까운 대도시 오클랜드나 로토루아에서 출발한 듯 보이는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단 하나, 글로우 웜(Glowworm)을 보기 위해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반드시 이것만은 하겠다고 다짐했다. 블랙워터 래프팅(Black Water Rafting)! 일반적인 래프팅과는 달리 동굴 안에서 튜브를 타고 급류를 타면서 글로우 웜을 볼 수 있다.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몸이 뜨는 검정색 전신 다이빙 슈트를 입고 끈으로 단단히 조이는 군청색 장화를 신고 랜턴이 달린 하늘색 헬멧을 쓴다. 제각기 크기가 다른 튜브를 어깨에 끼우고 뒷마당으로 나간다. 빵빵하게 부푼 튜브가 꽤나 무겁다.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숲길을 따라간다. 빗물에 황톳빛이 된 개천 모퉁이에 나무 디딤대가 높다랗게 설치되어 있다. 뛰어내리려는 걸까?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튄다. 다이빙은 다이빙인데 뒤로 뛴다. 꽤나 높아서 그냥 점프해도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새하얘진다. 까만 튜브를 엉덩이에 끼고 뒤돌아 있는데 끝자락으로 몸을 민다. 흘끔거리며 어정쩡하게 무릎을 구부리자 자세를 낮추라고 손짓한다. 동굴 안에서 몇 차례 이렇게 뛰어내려야 하고 그 높이가 3m가량 된다는 말에 긴장했나 보다. 힘차게 바닥을 차야하는데 뻣뻣하게 뒤로 몸을 뉘었더니 상체부터 수면을 내리친다. 물을 잔뜩 먹고 머리카락이 물미역처럼 시야를 가려 어질어질하다. 둥둥 떠내려가다 정신을 가다듬고 대열에 합류한다. 열둘의 탐험가들은 한층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동굴로 향한다.


열두 명의 탐험가들의 표정에서 설렘과 신남을 느낄 수 있다. 체격에 따라 튜브 크기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어린 시절 단양의 고수동굴과 제주도의 만장굴을 가보았다. 그 당시 경험에 비추어보면 동굴 입구는 동그랗고 커다란 형태를 띤다고 여겼는데 실은 그렇지 않나 보다. 이게 입구라고? 몸을 꽈배기처럼 꼬면서 꾸깃꾸깃 접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길쭉하게 난 입구는 햇빛 한 줌 허락하지 않는다. 안은 암흑 그 자체다. 한참을 더듬거리며 넘어져도 몸을 지탱할 만한 튼튼한 벽을 찾는다. 동굴 내부는 호리병처럼 굴곡이 심하고 미끄덩해 기댈만한 곳을 발견하기 어렵다. 랜턴을 달칵 돌리자 얇은 빛이 뻗어 나와 벽면을 노랗게 덮는다. 불 꺼진 방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주위를 비추듯 고개를 까딱대며 시야를 확보한다. 불규칙한 리듬이 머리를 두들긴다. 턱끝을 공중으로 추켜올리자 천장에서 종유석이 반쯤 녹아내린 소프트 아이스크림 마냥 거꾸로 매달려 있다.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헬멧의 능선 끝을 꼭 부여잡고 있다가 콧등을 따라 미끄러져 입가를 적신다. 달짝지근한 초코 아이스크림 맛은 아니다. 발을 떼자 돌부리 같은 무언가가 앞코에 부딪힌다. 울퉁불퉁한 달 표면처럼 모양새와 크기, 높이가 제각각인 석순이 가지를 뻗고 있다. 이곳은 땅속의 물이 빚어낸 석회암 숲이다. 


어딘지 말하지 않으면 절대 입구를 찾을 수 없다. 와이토모 동굴은 석회 동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 또 머리를 찧었다. 헬멧이 없었으면 한참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었을 테다. 혹이 벌써 여럿 난 것 같다. 바짝 몸을 숙인다. 바닥에는 빗물이 배수구를 향하듯 개울물이 낮은 곳으로 졸졸 흐른다. 엎드린 자세로 미끌미끌한 바닥을 두 손과 양 무릎으로 더듬는다. 앞을 내다볼 겨를이 없다. 딱 한 치만 본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언틀먼틀한 터널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 시각이 둔해지자 귀와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웅웅대는 동굴의 작은 소리와 저 멀리 철썩이는 물살의 움직임이 귓가를 파고든다. 정강이와 손바닥에 닿는 바닥의 들고나는 모양과 손가락을 적시는 물결의 온도가 피부처럼 느껴진다. 허리를 길게 늘인 시간을 타고 통나무처럼 기다란 석회암 관을 빠져나온다. 숙인 고개가 뻐근해져 한 손으로 헬멧을 지탱하고 뒷목을 늘이자 너른 동굴 내부가 들어온다. 문득 거대한 물고기 뱃속에 들어앉은 요나가 된 듯하다. 와이토모가 우리를 집어삼킨 걸까? 날카로운 이빨 같던 입구를 비집고 들어간 건 나 자신이니 탓할 수도 없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 축축했던 바닥은 이내 집채만 한 물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겨우 목을 물 밖으로 뺄 만치 차오른다. 밖에서 딱딱한 바위 같았던 동굴의 속살은 높고 낮은 굴곡이 있고, 깊고 얕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길이 뺨을 내리칠 때면 로프에 의지해 전진하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다. 둥둥 뜬 튜브의 흐름에 맡겨도 방심할 수 없다. 드러눕다시피 허리를 젖히고 낮게 내려온 천장을 손으로 밀어내야 한다. 쪽빛 열매를 보기 위해서는 어둠을 헤치고 차가운 물살을 가르고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절실함이 필요한가 보다.


동굴에서는 바닥을 기고 엉덩이로 걷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흐르는 물 위에서 튜브에 엉덩이를 끼우고 다리를 앞으로 뻗으세요. 내 다리를 앞사람 튜브 위에 올려요. 그다음에는 내 튜브 위에 얹은 뒷사람의 다리를 잡아요. 내 앞사람이 나의 다리를 잡고 내가 뒷사람의 다리를 잡는 거죠. 기차처럼 말이에요. 물살을 가를 필요도 없어요.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물길이 멈추는 그곳까지 그렇게 흘러갈 거예요. 그리고 ‘츄츄’라고 소리 내어 주세요. 우리가 잘 가고 있다는 징표가 될 거예요.”

'츄츄' 열차가 출발한다. 짚고 있던 벽을 살짝 밀자 천천히 속도가 붙는다. 서로의 발목을 잡고 체온을 나누자 경직된 몸과 마음이 풀린다. 긴장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씩씩하게 츄츄를 외친다. 동굴 벽에 반사된 목소리는 크게 울려 기차의 연료가 된다. 울렁울렁 달리다가 장애물을 만나 정차한다. 낭떠러지는 동굴 안 폭포다. 쏟아지는 폭포수는 풍부한 수량과 합쳐져 힘 있게 반대쪽을 향해 간다. 개천에서 연습한 점프 실력을 보일 때다. 먼저 뛰어내린 사람들이 기차를 만들며 손짓하고 있다. 몸이 튜브와 분리되지 않도록 꼭 끼우고 깊게 무릎을 굽힌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힘을 실으면 두 배로 에너지가 든다. 구름판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뒤로 박차고 나간다. 얼굴을 덮는 물줄기와 고막을 자극하는 환호성에 아드레날린이 온몸으로 번진다. 와이토모는 마오리 어로 물(wai, 와이)과 구멍(tomo, 토모)을 합친 말이다. ‘구멍을 따라 흐르는 물’, 그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 아닌가. 거대한 물결은 이곳이 과연 동굴 안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서늘한 체온과 한층 열기를 더하는 떨림을 싣고 다시 ‘츄츄’ 열차가 출발한다.


동굴 래프팅을 하려면 폭포를 뛰어내리고 헤엄을 치고 천장을 열심히 밀어야 한다.


 “글로우 웜에 대해 들어봤나요?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지만 반딧불이보다는 모기의 이웃사촌에 가까워요. 글로우 웜은 날지 못해서 거미처럼 끈적끈적한 실로 둥지를 짓고 동굴 천장 아래로 줄을 내려뜨려요. 많은 사람들이 짝짓기를 위해 빛을 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먹이를 유인하기 위함이죠. 빛을 보고 다가오면 끈적끈적한 실 그물에 걸려 잡아먹히게 되죠.”

랜턴을 끈다. 검정 크레파스보다 진한 어둠이 내리자 저 너머에서 에메랄드빛 반짝임이 일렁인다. 동굴 천장에서 기다란 줄이 내려오고 줄 사이사이에서 선명한 나부낌이 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은 아니다. 벌레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기이한 나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 같다고나 할까. 글로우 웜은 반딧불이처럼 공간을 넘나들 수는 없지만 생동하는 에너지로 자신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그 순간 움직이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강한 생명력을 뿜어낼 수 있다는 역설을 목격한다. 호흡이 멎고 소리가 잠긴다. '츄츄' 열차는 검은 물결 위를 둥둥 항해하며 글로우 웜 터널을 통과한다. 이렇게 낭만적인 기차 여행이 또 있을까? 그런데 왜 ‘츄츄’라 부를까? 몽골에서 ‘츄츄’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마 그들은 모를 게다. 주문 같은 짧은 한마디는 멈춰있던 말을 움직이게 한다. 츄츄(가자, 출발)! 동굴 속 튜브는 초원을 달리는 말이 된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면 별이 쏟아지던 몽골처럼 초록빛 실타래에 달린 별빛이 점점이 내린다. 별이 하늘에 매달려있다고 생각한 옛사람들에게 이보다 완벽한 이미지가 있을까. 팔을 뻗으면 닿을 듯, 대낮에 만난 쪽빛 속에서 헤엄친다.


민트빛 실타래 글로우웜이 동굴을 비춘다. 한낮에 만난 초록은 시린 물살을 가르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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