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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17. 2021

마오리의 사랑 노래, 포 카레 카레 아나

@로토루아, 뉴질랜드



 그 옛날 청춘영화를 떠올리면 잔잔한 기타 선율과 함께 귓가를 맴도는 음악이 있다. 여름밤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여럿이 둘러앉아 입을 모으는 장면이 선하게 그려진다. 한 손은 하늘을, 다른 한 손은 모래를 향하게 하여 옆 사람과 번갈아 손을 건네는 놀이도 하면서 말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낭만의 표상이었던 추억의 곡 ‘연가’를 다시금 만났다. 마오리 마을에서 그들의 공연이 무르익을 무렵 젊은 연인이 나와 서로를 바라보며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첫 소절이 나오자 공연장은 한 차례 술렁임이 인다. 분주하게 셔터를 누르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손이 있는가 하면, 들뜬 마음을 표한 후 작은 움직임으로 모국어 가사를 띄우는 입술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이 곡의 고향은 바로 ‘로토루아’이다.


마오리족이 전통민요를 부르며 공연을 하고 있다.


 흔히 연가로 알려진 이 노래의 원래 이름은 ‘포 카레 카레 아나(Po kare kare ana)’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뉴질랜드 민요이지만 정확히는 마오리족 음악이다. 마오리족은 미국의 인디언이나 호주의 어보리진(Aborigine)처럼 뉴질랜드를 터전으로 살아온 원주민이다. 흥미롭게도 이 곡의 사연은 낯설지 않다. 뉴질랜드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훨씬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물론 무대는 이탈리아 베로나가 아니다. 로토루아 호수를 배경으로 한 히네모아와 투타네카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옛적 로토루아 호수에 마오리족이 살았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전쟁을 벌이곤 했다. 로토루아 호수에는 모코이아(Mokoia) 섬이 있는데 그 섬에 살던 아리와 부족과 호숫가에 살던 훠스터 부족도 그러했다. 아리와 부족 추장의 딸 히네모아는 훠스터 부족 추장의 아들 투타네카이의 피리 소리를 듣고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두 부족은 원수지간이라 두 사람은 몰래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투타네카이는 밤마다 호숫가에서 피리를 불었고 히네모아는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참지 못해 카누를 타고 호수를 건너 마음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네모아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막기 위해 카누를 모조리 불태웠다. 투타네카이는 이 소식을 모른 채 그날도 그녀를 기다리며 피리를 불었다. 히네모아는 몸에 표주박 수십 개를 동여매고 머나먼 호수를 헤엄쳐 건너갔다. 결국 목숨을 건 딸의 사랑에 아버지는 굴복하였고 두 부족의 전쟁도 끝이 났다.


 이야기의 전개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하지 않은가? 적대적인 두 집안의 아들딸이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부모의 반대로 시련을 겪는다. 끝끝내 그들의 사랑이 두 집안을 화해시킨 점도 유사하다. 비록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에 이르렀고 히네모아와 투타네카이는 결실을 이룬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로토루아 호수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훨씬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어를 그대로 번안한 가사의 첫 소절에는 로토루아 호수가 등장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로토루아는 내륙지방이라 바다가 없는데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라 묘사한다. 로토루아 호수는 북섬에서 두 번째 큰 호수로 지름이 22km에 달한다. 당시 마오리족에게 바다로 느껴질 만큼 거대했던 셈이다. 변화무쌍한 뉴질랜드의 날씨로 미루어볼 때 거센 파도가 치거나 폭풍이 휘몰아치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호수의 규모를 헤아려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가히 아버지를 설득시키고 바다를 감동시켜 잔잔하게 만들 만하다.


로토루아 호수는 유황을 다량 함유하여 희뿌연 황록색을 띠고 계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히네모아가 헤엄쳐 간 호수는 사실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르는 유황온천이었다.


 투타네카이의 피리 소리를 히네모아가 실제로 들을 수 있는지, 그 먼 거리를 표주박 수십 개에 의지해 건너는 것이 가능한 지에 대한 의구심을 제쳐놓고서라도 이야기 속에는 주목할 만한 요소가 있다. 주인공 히네모아는 능동적인 여성의 태도를 보여준다. 대개 바다를 건너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간다면 그 주체가 남성이리라 기대하지 않는가? 오히려 투타네카이는 히네모아의 상황은 알지 못한 채 호숫가에서 피리를 불며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한 쪽도 사랑을 이루려 목숨을 건 쪽도 히네모아,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상은 뉴질랜드의 사회상과 맞닿아있다. 뉴질랜드는 여성 인권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인정하였는데 영국으로부터 자치령 지위를 획득하여 독립한 1907년보다 14년 앞서 있다. 특히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세계 각국에 영향력을 선보이고 있다. 뉴질랜드 내 어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도 여성인권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관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니 뉴질랜드 사회에서 여권 신장이 주된 화두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잡지 'Herstory'는 제목처럼 여성인권 운동과 맥이 닿아 있다.


 뉴질랜드 내에서 마오리 문화가 차지하는 위상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원주민들은 대학살을 당했고 그들의 문화는 사장되었다. 마오리 족 역시 침략을 당했고 정복자들은 그들의 터전을 빼앗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인접 국가 호주 원주민인 어보리진이 당한 불행한 역사와 인종차별을 떠올리면 뉴질랜드 사회에서 마오리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은 꽤나 인상적이다.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탑승할 때 승무원들은 마오리 말로 “키아 오라(Kia Ora,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그 짧은 한 마디는 뉴질랜드의 강렬한 첫인상으로 자리매김한다. 홍보책자나 영상을 살펴보아도 마오리족과 그들의 문화를 우선적으로 소개한다. 단순히 그들을 차별화된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뉴질랜드는 영어와 마오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거리의 표지판부터 미술관의 작품 설명에 이르기까지 항상 영어와 마오리어를 함께 쓴다. 정부에서는 마오리족을 뉴질랜드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지원금과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마오리 족은 전체 인구의 14%로 여전히 소수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시도는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멀디 먼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20만 명의 적은 인구가 부른 곡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까닭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사랑 노래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배경에서 전해졌다. 이 곡은 1917년 세계 1차 대전 때 초연되었고 마오리 족 출신의 뉴질랜드 국민가수 키리 테 카나와(Kiri Te Kanawa)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계기는 놀랍게도 한국전쟁이었다. 뉴질랜드는 당시 6천여 명을 파병했다. 참혹한 실상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불렀는데 선율과 가사에 담긴 진심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나 보다. 뒷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 이 곡을 들을 때면 마음의 짐을 진 듯하다. 우리 모두 가족을 떠나 타국에서 노래를 부르며 희생된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해 본다. 신기하게도 우연의 일치인지 이 곡은 전쟁 가운데 전해졌다. 히네모아와 투타네카이의 사랑이 전쟁을 종식시켰듯이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평화의 씨앗이 된 건 아닐까?


살아있는 화산을 보고 싶다면 로토루아만 한 곳이 없다. 지글지글 끓는 온천과 하늘로 솟아오르는 간헐천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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