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 쿡, 뉴질랜드
눈이 다져지고 또 다져지면 무엇이 될까? 인간의 생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이 지나면 쌓인 눈은 두터운 얼음 층으로 변한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빙하라 부른다. 높이 3754m, 뉴질랜드 최고봉 마운트 쿡(Mount Cook)은 빙하를 머금고 있다. 당시 쿡 선장은 마운트 쿡이 온대지방에서 가장 큰 빙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의 이름이 붙여지기 전, 마운트 쿡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오라키(Aoraki), 마오리 말로 ‘구름을 꿰뚫는 자’를 뜻한다. 그 봉우리가 구름에 잠기는지, 혹은 헤치고 서있는지 확인해야겠다.
마운트 쿡으로 향하는 길은 색의 향연이다. 이차선 도로의 동쪽에 자리한 푸카키(Pukaki) 호수는 물망초 빛 비단옷 자락을 펄럭이며 고고한 맵시를 뽐내고 있다. 호숫가에는 유난히 멈춘 차량이 많은데 푸카키의 독특한 색감에 매료된 것이리라. 칵테일 잔에 물을 뜨면 블루하와이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다. 이 빛깔은 한 낱말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밀키 블루(milky blue)라 이름 붙여 본다. 밤하늘에 헤라의 젖을 뿌려 은하수를 만든 것처럼 푸른 호수에 진한 우유를 풀어놓은 듯하다. 빙하가 머지않았다. 호수로 흘러드는 우윳빛 실개천을 따라가자 하얀 갑옷을 입은 쿡 선장이 늠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얼음의 섬이다. 정상에는 만년설이 수북하다. 동쪽 능선을 따라 가장 큰 태즈먼 빙하가, 서쪽 비탈에서 폭 500m의 프란츠 요셉과 폭스 빙하가 흘러내린다. 빙하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이다. 묵묵히 걸어 그 끝에 다다르거나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날아올라야 한다. 이마저도 하늘의 허락이 필요하다. 수시로 날씨가 바뀌는 고산의 특성상 마운트 쿡의 기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내일 아침 걸을 수 있기를, 늦은 오후 헬기가 뜰 수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예보는 단지 예보일 뿐이다.
피곤한 몸을 누인다. 맞은편에는 싱가포르 청년이 상처 난 발을 동여매고 있다. 발목까지 목이 올라오는 풀색 등산화와 거북이 등껍질마냥 볼록한 40L 배낭이 그녀를 설명한다. 남섬 여행 중 쉽게 만날 수 있는 트레킹 족이다. 반년 동안 남섬을 걸어서 종단한다는 계획에 입이 떡 벌어진다. 나도 내일 후커 밸리(Hooker valley)에 간다. 왕복 4시간 거리인데 숙소에서 입구까지도 꽤 멀어 1시간이 더 걸린다. 오후에 헬기를 타고 빙하에 오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마음을 다지고 몸을 푸는데 어라, 무언가 없다. 오른 약지 발톱이 빠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새 발톱이 다 나지 않았다. 운동화가 잘 맞지 않았던 걸까.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으니 무리가 됐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 내일 긴 거리를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잠이 오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숙소 앞마당으로 나온다. 산책이나 해야지.
구름이 걷힌다. 가려졌던 아오라키의 뽀이얀 얼굴이 시나브로 드러나자 시선 가득 빛이 든다. 가슴팍의 빙하는 표피를 한층 더 견고하게 다듬는다. 수만 년 무게를 싣던 얼음덩어리를 덜어내면 어떠할까. 아오라키의 피부와 어깨선은 지금 눈에 비치는 모습과 다를지도 모른다. 자꾸 멈춰 서게 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냉랭한 공기는 갓 딴 풋사과를 베어 문 것 마냥 청량하기 그지없다. 병풍처럼 펼쳐진 측면을 훑어본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래로 파인 세로 줄무늬는 몸체를 휘감는 망토가 된다. 빙하가 지나간 길은 아닌지 과거의 흔적을 더듬게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한 걸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정취에 숨이 턱턱 막힌다. 한낱 마을의 모퉁이다. 후커 밸리의 길목에 한참 다다르지 못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나온 발걸음은 마음 한가운데를 세게 눌러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그림자가 농구 골대만큼 자란다. 해는 아오라키의 등을 타고 내려간다. 서둘러야 한다. 온 길을 찬찬히 되짚는다. 세 발자국 앞 고동색 나무판자 길 위에 누군가 엎드려 있다. 풀숲으로 머리를 감추고 한껏 집중하는 모양새다. 재미난 게 있는 건지 수풀 안을 골똘히 주시하는 세 개의 눈을 엿본다. 투명한 프레임 안에 의미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풀잎에 바지를 젖게 하고 손에 모래를 묻게 한다. 샤사삭. 다람쥐가 배를 긁다 화들짝 놀라며 달음박질친다. 흙과 풀 무리를 헤치던 렌즈의 소실점이 흐릿해진다. 초점 끝에 내가 있다. 렌즈에 가려졌던 눈은 놀람과 동시에 반가움을 띄운다. 목에 무겁게 멘 검정 카메라, 보조가방을 뚱뚱하게 채운 삼각대와 렌즈, 액션캠(action cam). 각종 촬영 장비를 짊어진 그는 별을 사랑하는 중국 청년 데이비드다. 푸카키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별을 관찰하기 좋은 마운트 쿡에서 하루밖에 머물지 못한다며 수차례 아쉬움을 표했었다.
“사진은 많이 찍었어?”
“빙하 보여줄까? 덩어리째로 떠있더라.”
상기된 목소리에서 전달되는 떨림은 오늘 밤하늘에 대한 기대와 약속으로 전이된다.
뉴질랜드의 가장 높은 봉우리, 그 지붕 아래의 밤은 차갑고도 적막하다. 작은 마을에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와 가정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거리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마저 없다. 손바닥을 코앞에 마주대도 윤곽이 그려지지 않는다.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자 가시거리는 두 걸음 안팎이다. 배터리에 발간 빛이 깜빡인다.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른다.
(벨소리)
지수 : 데이비드 어디야? 나 지금 걸어가고 있어.
데이비드 : 너희 숙소 근처야. 어디쯤?
지수 : 길 잃은 거 같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달칵, 뚜뚜뚜뚜……)
전화가 끊어진다. 수화기 너머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터덕터덕.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가까워지고 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다. 여름이 비껴간 걸까. 몸이 조금씩 떨려온다. 여행 중 처음 맞는 공포다. 하얀 빛줄기가 얼굴로 쏟아진다. 깜깜한 방 안에서 갑자기 불을 켜면 눈이 부시듯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다. 한쪽은 감고 다른 쪽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떠보니 광원의 주인이 나타난다. 두 뼘 정도 큰 키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사내다. 생글생글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 뒤늦게 들린다. 네 녀석은 데이비드! 등짝을 후려친다.
숙소 문 앞에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걸음이면 나무 벤치가 있다. 누군가에게 안식을 주었을 조금은 울퉁불퉁한 그 살결에 등을 마주 댄다. 하늘이 넓어진다. 손을 가만히 뻗는다. 스치는 바람이 스산하다. 외투에 달린 털이 북슬북슬한 모자를 쿠션처럼 벤다. 데이비드는 옆에서 분주한 몸짓으로 삼각대의 가느다란 철제 다리를 이리 펴고 저리 고정시킨다. 머리맡에는 다가올 밤을 꼬박 지킬 액션캠을 놓는다. 지금의 반짝임을 그대로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별의 많고 적음, 별무리의 자리와 모양새, 별빛의 변주가 눈에 담기는 전부가 아니기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백발의 노부부, 앞마당에서 팔을 벌리다 이내 두 손을 마주 잡는 꼬마 아가씨,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풍경이 있다. 아오라키에서 골짜기 마을로 불어오는 산바람의 소삽함이, 조용히 풍기는 풀 내음이, 상쾌함을 넘어 짜릿하게 머리를 울리는 온도가 있다. 그럼에도 순간을 포착하려는 열성은 그날을 환기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됨을 안다.
소리가 잦아든다. 감탄과 탄성과 경이의 끝맺음은 속삭임과 지긋한 바라봄이다. 응축된 마음의 아우성을 절제된 언어로 발산한다.
“내 생에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야.”
옆자리 카메라를 만지던 데이비드가 꿈꾸듯 말한다.
북반구에서 나고 자랐기에 남쪽 하늘이 낯설게 다가온다. 길잡이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는 없지만 난생처음 보는 남십자성이 있다. 달이 기울수록 별들은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 반짝이는 빈도, 반짝임의 크기, 점점의 별들이 뿜어내는 빛의 세기에 온 마음이 일렁인다. 시계를 본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추위에 그 옛날 폭신한 이불을 덮고 별무늬 형광 스티커가 붙은 천장을 바라보던 따뜻함을 곱씹는다. 내일은 분명 날씨가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