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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27. 2021

빗소리, 그네들의 삶이 평안하길

@퀸즈타운, 뉴질랜드


여행 내내 함께한 친구가 있다. 약속하지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일정이 겹쳤다. 그래서 싫었다. 오늘만은 제발 안 마주쳤으면 했는데 문 앞에서 딱 만났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선택권은 없었다. 에휴, 누구를 탓하랴.  -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 -


 그 친구를 드디어 만났다. 여행 내내 들리는 어마 무시한 후기들에 진땀 흘리며 제발 나는 피해 가길 바랐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반나절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나로서는 선방한 셈이다. 여행을 망쳤다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이 도시를 떠나는 아침 반갑게 문을 두드리던 친구 ‘’이다. 


 여행 첫날 거무스름한 하늘과 기분 나쁜 무게의 습도가 몸을 내리눌렀다. 비바람의 흔적이었다. 며칠 전 윌리윌리(willy-willy)가 뉴질랜드에 상륙했다. 호주, 뉴질랜드 인근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은 이름 그대로 ‘우울’과 ‘공포’를 선사했다. 윌리윌리는 북섬에서 남섬으로 이동했는데 통칭 뉴질랜드 국민 루트를 지르밟고 가셨다. 관광지 대부분이 자연경관임을 감안하면 이 비바람이 여행자들에게 안겼을 절망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윌리윌리의 뒤를 밟은 나는 운 좋게도 끝내주게 좋은 날씨를 누렸다. 비는 불청객일 때가 더 많다. 물론 내가 여행자라면 말이다.


북섬에서 남섬으로 넘어가면 색감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남섬의 초목은 노란 레몬빛을 띄고 바다는 청량한 하늘빛이 감돈다.


 남섬에서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뉴질랜드는 남섬이야. 남섬을 먼저 보고 북섬으로 올라오니까 별로야. 북섬부터 시작할걸 그랬어.”

두 섬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 개인적인 취향을 가득 담은 논의는 제쳐두자. 수차례 두 섬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들었지만 솔직히 뭐 그리 다를까 했다. 뉴질랜드의 크기는 한반도의 1.2배 남짓하다. 일본처럼 세로로 긴 나라이다 보니 기후 차이는 어느 정도 있겠지만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리라 여겼다. 바다를 건너 남섬의 상공을 낮게 비행할 즈음 거짓말 같던 그 말은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색감! 잘 익은 블루베리와 싱싱한 아보카도 껍질의 색깔은 북섬에, 여름날 완두콩 꼬투리와 청명한 가을 하늘의 빛깔은 남섬에 어울리겠다. 남섬이 한국 여행자에게 보다 신선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우리나라가 싱그러운 북섬의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남섬의 색감을 맛보기에 퀸즈타운(Queenstown)만 한 곳이 없다. 1862년 골드러시(gold rush)로 몰려든 이민자들이 ‘아름다움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어울린다’하여 여왕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누군가 퀸즈타운을 방문한다면 시내로 향하는 지독한 교통체증은 잊게 될 게다. 창가에 코를 다닥다닥 붙이고 입을 벌리며 눈을 바삐 돌려야 한다. 만년설을 품은 와카티푸 호수(Wakatipu)가 길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리어로 비취 호수를 뜻하는 와카티푸는 거대한 옥 덩어리가 물속에 잠겨있는 듯하다. 전체 모양새는 해리포터 이마의 번개 흉터를 연상시키는 N자형인데 호숫가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둘러싼 산들이 좁고 기다랗게 휘어진 호수를 단면으로 잘라 그 형태와 크기를 굴절시킨다. 보트를 타고 굽이굽이 물줄기를 따라간다. 총길이 80km, 뉴질랜드에서 가장 긴 호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가지에서 보이지 않던 언덕의 목덜미와 등허리는 와카티푸 거울에 반사되어 청량한 물빛을 한층 부각한다. 엄지가 절로 올라간다.     


 호수 너머 하얀 봉우리가 구름으로 덩치를 키웠다가 줄였다가 한다. 와카티푸의 모태인 남알프스 산맥이 놀이를 하나보다. 북섬의 로토루아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칼데라 호수라면, 남섬의 와카티푸는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빙하호이다. 300m가 넘는 수심은 땅을 깎아 계곡을 만든 빙하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와카티푸는 일정 시간 간격으로 수면이 오르내린다. 옛 마오리 사람들은 그것을 호수 바닥에 누워 있는 거인의 심장 박동이라 믿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쏟아지는 다채로운 화제 중 나를 사로잡은 건 사람이다. 이야기보따리에 손을 깊숙이 넣어 그네들만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와카티푸 호수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인다. 퀸즈타운에서는 꼭 보트를 타고 풍경을 감상하자.


 노란 언덕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 차창 너머 펼쳐진 양 떼와 말들을 보며 한 상상이 현실이 된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퍽 잘 어울리는 중년의 여성 샤를로트는 퀸즈타운 근교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농장의 주된 프로그램은 승마이다. 마중 나온 그녀의 손을 맞잡자 단단한 손아귀 힘에 고삐를 쥔 듯하다. 주근깨를 뿌린 콧잔등과 시원스러운 입매, 화통한 성격의 샤를로트 덕분에 곧 만나게 될 녀석이 괜스레 듬직하게 느껴진다. 쭉 뻗은 고속도로에서 꺾어 흙냄새 자욱한 길로 들어선다. 작고 울퉁불퉁한 돌멩이에 타이어가 들쑥날쑥 춤을 춘다. 입구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다. 샤를로트는 그녀의 이름이 제시카라고 슬쩍 언질을 준다. 제시카는 검정 부츠에 짧은 바지, 흰 민소매 셔츠를 입고 서부 영화에 나올 법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그녀는 워킹홀리데이를 끝마치고 뉴질랜드에 정착하였다. 이 농장에서 일한 지도 벌써 삼 년째 란다. 투어 가이드나 액티비티 진행자와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고향이 다른 나라임을 알게 되는 일이 잦다. 워킹홀리데이가 활성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기간이 지난 후에도 이곳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구간 옆 창고에서 귀여운 소녀가 두리번거리고 있다. 여섯 살이지만 어엿한 마부다. 이젠 내가 변신할 차례다. 밑창이 단단한 굽 있는 부츠를 신고 약간 헐렁이는 승마 모자를 고정시킨다. 아차, 장갑을 빠뜨렸다. 손바닥이 까지겠다. 마당으로 나오니 소녀의 어머니는 셔터를 누를 뿐이다. 소녀와 나, 그리고 한 쌍의 부부가 함께 말에 오른다. 나와 함께 할 샨디는 큰 키에 황토색 피부와 그보다 밝은 금빛 갈기를 가진 순한 말이다. 말은 영특한 동물이라 등에 오른 사람이 어느 정도인지 대번에 간파한다. 초심자의 경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지난여름 몽골 초원을 달리던 바람을 떠올리며 허벅지에 힘을 콱 준다. 얕보이지 말아야지. 훈련된 동물은 훈련된 방식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너른 농장을 눈에 담으려 고개를 돌리자 샨디가 방향을 튼다. 제시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샨디를 혼란시키지 마요. 고개를 돌리거나 어느 쪽을 바라보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내가 왼쪽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면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오른쪽을 가리키는 모순된 지시를 하는 셈이다. 등을 곧추세우고 오른쪽을 응시하자 샨디가 다시 몸을 튼다. 소탈한 웃음이 흐른다.

 “지수, 굿 걸(Good Girl)!”


 농장은 짜임새 있게 나누어져 있다. 집 안의 방처럼 구역이 있고 각 구역을 촘촘히 심은 나무와 자물쇠 달린 철제문으로 구분한다. 농장 안 여러 동물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작은 담인 셈이다. 양, 염소, 토끼, 사슴은 자신의 자리에서 마른풀을 뜯으며 한가로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종종 샨디는 배설물을 쏟아내려 멈춰 서거나 가지에 달린 잎에 입맛을 다시며 딴청을 피우긴 하지만 비교적 훌륭히 따라준다. 평지를 지나 언덕이 나오자 달릴 준비를 하라는 신호가 보낸다. 샨디의 엉덩이를 내리치자 금세 속도가 붙는다. 무게중심을 옮기고 고삐를 꽉 당기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짜릿한 긴장이 감돈다. 같은 속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극적으로 변화하는 운동감이다. 네 발굽에서 전해지는 땅의 진동과 박차고 나가는 불규칙한 리듬감이 심장소리와 합쳐져 귓속을 울린다. 안단테(andante, 느리게)에서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로 천천히 템포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아다지오(adagio, 매우 느리게)에서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로 샨디는 근육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고 나간다. 고삐를 잡은 손에 땀이 차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공포와 흥분이 뒤섞여 언덕을 밀고 올라선다.


산으로 둘러싸인 노란 언덕을 샨디와 함께 달리면 가슴이 탁 트이면서도 짜릿하다.

     

 마구간 옆 프런트에서 차가운 물을 들이켠다. 열린 문 넘어 여물을 먹는 샨디의 옆얼굴이 보인다. 즐거웠어, 샨디. 굿 걸(Good Girl)! 나를 부르는 샤를로트의 음성이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들려온다. 퀸즈타운 시내로 돌아갈 시간이다. 새삼스럽지만 농장은 아무나 운영하는 게 아닌가 보다. 샨디와 다른 말들의 생김새에 대해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샤를로트는 바로바로 이름을 맞추고 그들의 특징과 건강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농장 규모가 워낙 커 운영이 쉽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는 점이 놀랍다. 창밖을 보며 흘리듯 감상을 말한다.

 “정말 아름다워요. 온 산과 들에 노란빛이 돌잖아요. 한국은 북섬과 비슷해서 늘 푸르러요. 이런 풍경은 볼 수 없죠.”

 “노란 풀이 자라는 건 그만큼 이곳이 건조하기 때문이에요.”     


 건조하다라. 며칠 전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마이클과의 대화가 스쳐 지나간다. 영국 서부 해안가 출신의 마이클은 뉴질랜드에서 생활한 지 여덟 해가 넘었다.

 “올여름은 정말 건조해요. 퀸즈타운 근교 농장과 와이너리 모두 어려움을 토로해요. 남섬 북부의 픽턴이나 넬슨 쪽을 제외하면 대부분이죠.” 

마이클은 내년에 남섬 북부나 북섬의 도시로 이사할 계획이라 한다. 바다가 있고 초목이 우거진 곳으로 말이다. 녹음과 파도가 그리워졌냐고 물으니 그는 명료하게 답한다.

 “글쎄요, 전 원래 바다 사람이라. 두 섬이 굉장히 다르죠? 북섬은 트로피컬(tropical)하고 남섬은 건조(dry)하니까요. 북섬이 초록빛, 남섬이 노란빛을 띠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이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두 섬의 인상이 다른 까닭은 서로 다른 기후에서 비롯된다.     


알맞게 익어가는 포도밭과 와이너리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신선한 와인을 꼭 시음해 보자.


 우리나라의 여름과 달리 뉴질랜드의 여름은 지극히 건조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살이 하얗게 틔는 게 일상이다. 건조함은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곳은 겨울이 굉장히 길어요. 5월에서 9월까지 한 해의 절반이죠. 겨울을 잘 보내려면 여름에 비가 많이 와야 해요. 그래야 동물들을 먹일 건초를 마련할 수 있죠. 올여름만큼 비가 적게 온 적도 드물어요. 정말 걱정이에요.”

비단 가축만의 이야기겠는가. 들판에서 자신의 힘으로 생존해야 하는 수많은 동물들과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 모두에게 힘겨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     


 퀸즈타운의 마지막 아침 유리창에 빗방울이 차락거린다. 어깨를 적시며 캐리어를 앞으로 끈다. 젖은 머리카락으로 뿌연 시야를 걷어내다 잠시 선 자리에서 고개를 젖힌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비다.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다. 이 비는 이 땅에 뿌리내린 그네들에게 생활과 다르지 않다. 버스에 오르자 가늘게 떨어지던 이슬비는 몸집을 키워 바닥을 튀어 오른다. 가랑비 즈음이겠다. 잿빛이 된 와카티푸 거인은 무얼 하고 있을까. 말과 양, 토끼와 사슴이 긴긴 겨울을 평안히 보낼 수 있도록 건초가 충분하길 소망해 본다. 한여름의 뜨거움을 식혀줄 소나기가 내리길. 맑은 날 선물 같은 여우비가 들판을 적시길. 농번기 꿀비가 농부의 걱정을 씻어주길. 짧은 밤 도둑비가 몰래 더위를 훔쳐가길. 바람 없는 보슬비가 나그네처럼 조용히 머무르길. 새벽녘 풀잎에 이슬이 맺히길. 하루를 깨운 빗소리가 짐을 옮기는 불편함보다 위로로 다가온 건 그 때문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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