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 지 3년 차, 그간 팬더믹으로 언택트 마라톤에 참여하였다. 거리두기 제한이 풀리면서 드디어 기다리던 오프라인 대회가 열린다. 첫 경기로 서울레이스의 하프 코스를 신청한다. 가장 멀리 뛴 거리가 12km인데 두 배 가까이 되는 21km를 소화할 수 있을까?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낼 거라 믿으며 겁 없이 달려든다. 그땐 몰랐지. 달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고통이 산술적으로 커지는 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진다는 것을. 훈련을 미루고 미루다 대회 3주 전에 이른다. 5~10km 내외를 달리던 나에게 촌철살인의 비수가 날아온다.
-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요? 20km는 미리 뛰어봐야죠. 내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점검해야 해요.
그제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는다. 안일하게 준비해서는 완주조차 장담할 수 없다. 부랴부랴 장거리 연습을 계획한다. LSD(Long slow distance)는 긴 거리를 천천히 달리며 지구력을 기르는 훈련법으로, 느리게 뛸수록 다리에 하중이 많이 실려 단련 효과가 크다. 15km LSD 앞두고 지레 겁을 먹는다. 호흡이 달리지 않을까, 부상을 당하면 어떡하나 온갖 생각이 든다. 옆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페이스를 유지하자 생각보다 할 만하다. 막바지에는 거칠게 호흡하며 무거워진 다리를 부여잡았지만 말이다. 역시 해보기 전에는 두렵지만 해내고 나면 자신감이 생긴다. 20km까지 거리를 늘려 훈련하니 하프 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대회가 너무 기다려진다.
2022 서울레이스 하프 코스도
설렘으로 날밤을 샜다. 마라톤 특성상 이른 아침에 경기를 진행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첫 차를 탄다. 지하철 안은 러닝 복장을 한 사람들로 만원이다. 달리기를 사랑하는 수많은 주자들과 러너로서 함께 뛸 수 있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일요일 아침 서울 광장은 핑크빛 물결로 일렁인다. 분홍색 공식 티셔츠를 갖춰 입은 거대한 무리는 2002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를 연상케 한다. 3년 만에 열린 오프라인 마라톤 경기에 대회장은 만 명이 넘는 참가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출발을 알리는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쩌렁쩌렁 울리는 흥겨운 음악, 펜스 너머 왁자지껄한 응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주자들의 함성이 뒤섞인다. 시합 전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제자리에서 콩콩 뛴다. 기분 좋은 떨림과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흥분에 가만있지 못하겠다. 평소라면 차량으로 빼곡한 세종대로를 하프 마라톤 주자가 내달린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난 널찍한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자 그제야 내가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게 실감 난다. 인생 첫 하프 코스, 목표는 21.0975km를 건강하고 즐겁게 완주하기!
경기 초반부터 빈틈을 찾아 요리조리 전진하는 고수가 있는가 하면, 페이스 조절을 하며 후반 스퍼트를 노리는 노련한 선수도 있다. 경복궁 돌담을 따라 삼청로 언덕을 오르자 주변 러너가 속도를 올린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진다.
- 오르막인데 무리하지 마. 나중에 퍼져.
같은 크루의 베테랑 선배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나를 다독인다. 맞다, 뒤쳐질까 봐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나의 레이스를 하면 된다. 내리막길을 거쳐 광화문광장으로 나오자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숭례문 반환점을 돌 무렵에는 굵은 빗줄기에 시야가 흐릿하다. 따로 모자를 쓰지 않아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연신 세수를 한다. 옷은 물기를 머금어 점점 무거워지고 곳곳에 생기는 물웅덩이에 운동화 속까지 축축하게 젖는다. 첫 하프 마라톤이 우중주(雨中走)일줄이야! 달리기 힘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온다. 호흡이 편안하고 뛰는 게 힘들지 않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인가. 30분 이상을 달리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긴다. 피로가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온다. 평지를 걷는 것처럼 숨이 안정되자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19km 지점에서 응원받고 신난 내 모습
10km 지점을 돌파하자 걷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보인다. 앞선 주자를 하나둘 제치며 나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운영한다. 힘이 달릴 때면 주로 옆에 설치한 테이블로 달려간다. 종이컵에 담긴 물과 이온음료를 들이켠다. 사전에 준비한 파워젤은 땀과 빗물로 미끌거려 뜯어지지 않는다. 에너지원이 필요한데 바나나는 목이 막힐 것 같아 먹을 수 없다. 그때 우비를 쓴 여성분이 팔을 뻗어 외친다.
- 콜라 있어요, 콜라!
콜라는 마실 수 있다. 가쪽으로 붙어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콜라를 건네받는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종이컵 입구를 꾹 눌러 소중한 콜라가 쏟기지 않게 한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삼킨다. 김 빠진 콜라는 목구멍을 탁 치는 따가움 없이 극강의 달콤함을 선사한다. 천상의 맛은 입안을 감돌며 지친 몸에 당을 충전한다. 지금까지 먹은 어떤 콜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다.
19km 구간은 러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이다. 피로가 극에 달한다. 이 악물고 뛰는데 저 멀리 크루 깃발이 보인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크루원을 향해 손을 흔들다. 내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반갑게 맞이한다.
- 지수다, 지수! 지수 파이팅! 가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가 쫓아온다. 환한 미소로 커다란 손바닥 응원도구에 손을 부닥친다. 가장 힘든 시간대에서 응원을 받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 1km를 남기고 걷는 사람이 많아진다. 결승을 코앞에 두고 멈춘 주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한 번 유혹에 넘어가면 두 번은 쉽다. 못내 뿌리치려는 순간 크루 동생이 어깨를 두드린다. 우리는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가 된다. 호흡을 맞추고 끝까지 페이스를 늦추지 않도록 격려한다. 주위에서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쏟아진다. 지금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여지껏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로 지지에 화답한다. 마지막 100m는 이전의 100m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괴롭다. 끝이 눈앞에 보이니 더 힘들고 길게 느껴진다. 결승선을 통과하고 동생과 부둥켜안는다.
- 너 아니었으면 마지막에 걸었을지도 몰라.
- 언니 페이스 따라가려고 죽자고 뛰었는데?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의지하며 함께 첫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 찡한 감정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대회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기록은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이자 노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직관적인 숫자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과정과 연대가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연습하는 성실함, 크고 작은 부상과 여름날의 더위를 이겨내는 끈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열정, 건강한 몸에 깃든 단단한 마음. 경기는 서로의 노력을 인정하고 성취를 축하하는 축제의 장이다.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러너에게 진심을 담아 응원하고 도움을 준다. 주자와 응원단, 현장 스탭과 주민 가릴 것 없이 그날 대회장의 모두는 달리기라는 공동의 연대 의식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의 도전을 지지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종목이 무엇이든 기록이 어떠하든 우리는 같은 길을 달렸고 함께 그날의 열기를 느꼈다. 벅찬 경험을 공유하고 진심 어린 교류를 주고받으면서 진한 사람 냄새나는 러닝 문화에 깊숙이 빠져버렸다. 사진에 담긴 환한 웃음을 보며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긴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나는 주로에 있을 것이다. 러너여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