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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f Dobby Jul 07. 2015

그런다고 젊어질까?

꼭 애비의 흰머리를 염색하겠다며 딸아이가 사들고 온 염색약은 한 달이 넘게 식탁 위에 놓여만 있다.

염색을 하자는 딸의 애교와 간청을 애써 무시하고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갔다.

난 흰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싫다.

애써 나이 먹어 감을 감추려는 생각도 없고 염색을 하는 이런저런 번거로움도 귀찮다.

거울을 마주하면 나도 안다.

세월의 흔적이 멋들어지게 드러나는 그런 흰머리가 아니라

듬성듬성 잡초마냥 삐쳐나온 새치가 지저분해 보이기 까지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난 염색하고 싶지 않다.


어제 점심

큰 조카가 아들을 순산했다.

그 기쁜 소식으로 졸지에 울 엄니는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누이들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창궐하는 메르스 덕택에 병원 출입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부모밖에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를 보러 가는 대신에 누이들과 모여서 점심을 먹으면서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물론 기쁜 일 인지라 반주도 한 잔 했다.

그렇게 즐거운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가 다시 한 번 애비를 꼬드긴다.


아빠 염색 좀 하자~

솔직히 얘기하면 난 그리 좋은 애비는 아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만들어 주지도 못했고

철이 없는 애비인지라 그저 친구 같은 애비일 뿐이다.

그렇게 말 할 때마다 안 하겠다고 버티는데도 이리 자주 권유하는 것이

혹 애비가 나이 들어가는 것이 지 딴에는 안타까워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소녀가 되고 이제 숙녀가 되어가나 보다.

요즘 들어 훌쩍 속이 깊어지고 애비에게 살갗게 대하는 딸의 마음이 보인다.


그래, 염색 좀 해 주라~

염색을 했다.

변덕스러운 애비 마음이 변할까 봐 신발을 벗자마자 염색약을 준비하고

애비를 의자에 앉힌다.

구석구석 정성 들여 흰머리에 염색약을 발라주는 딸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짝 눈물이 스민다.

예쁘게 자라주어서 고맙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고와서 감사하다.

듬성듬성 새치대신에 지나치게 검어진 머리의 거울 속의 사내가 낯설지만

울 딸이 이리 좋아하는데 자주 염색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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