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모나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상식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린다. '매출이 늘어난 이유는 우리의 제안서가 훌륭했기 때문이야.', '언론에 기사가 난 것은 기자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지',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지 못한 것은 개발자의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야', '내 전 여자친구는 진실되지 못했어'. 상식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그러한 상식은 정말 옳은 것인가? (아래 내용은 상식의 배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당신의 상식은 옳은가?
육군성의 연구 분과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과 종전 직후에 60만 명 이상의 군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 결과 중 한 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다.
"평균적으로 시골 출신자가 도시 출신자보다 군에서 훨씬 더 유쾌하게 생활한다."
시골은 커뮤니티가 잘 형성되어 있어 공동체 생활에 익숙할 거야, 혹독한 생활조건과 힘든 육체노동에 더 익숙하겠지. 무엇 때문에 큰 돈과 비용을 들이면서 이런 연구를 진행했을까?. 아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위 연구 결과는 거짓이다. 즉 실제 연구 결과는 도시 출신자가 군에서 훨씬 더 유쾌하게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도시는 규율과 질서에 맞춰 살고 엄격한 사회생활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아마 다시 이런 생각이 다시 들지는 않는가?
두 상식 모두 명백해 보이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자신이 추론할 수 있는 문제라면 자신의 해결 능력 범위 안에 있다 생각하고 단순하고 쉬운 상식적인 인과관계로 해석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많은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상식에 의존하여 결정하고 이윽고 실패하는 것이다. 상식이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결정이 정당화된다.
이러한 상식의 힘은 강력해서 사회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모나리자에 대한 상식 : 최고의 화가가 만든 최고의 작품?
모나리자. 이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 머리 속에는 완벽한 비율과 조형미, 그리고 신비로운 미소를 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완벽함을 보여주는 최고의 본보기', '광채를 내뿜은 거장의 솜씨' 등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브르를 방문하며 특별한 무언가를 보기를 기대하지만 놀랄 만큼 작고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모나리자를 보면서 자신은 미술평론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지런히 이 걸작을 찍어대기 시작한다.
정말 모나리자는 우리의 상식처럼 엄청난 회화적 기술이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일까?
1850년대까지 다 빈치는 라파엘로와 같은 회화의 거장만큼 화가로서 인정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1911년 8월 21일, 유명한 모나리자 절도사건으로 시작된다.
루브르 직원인 빈첸조 페루지아라는 자부심 강한 이탈리아 사람은 모나리자가 당연히 이탈리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모나리자를 훔쳐 2년 동안 자기 아파트에 숨긴 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그림을 팔아넘기려다 체포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대담한 절도행각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고 애국심에 감명을 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페루지아를 영웅처럼 대우했다. 그 후 모나리자는 공공기물 파손자가 산을 뿌렸고 그다음에는 볼리비아 젊은이의 큰 돌을 맞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20년대 예술의 전통적 질서를 파괴하는 다다이즘 열품이 불면서 마르셀 뒤샹과 같은 예술가들이 모나리자를 폐러디하기 시작하고 달리, 앤디 워홀 등에 의하여 수많은 변주를 당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나리자에 어떤 의미를 담을 때마다 모나리자는 그 의미를 삼켜 더욱더 커다란 의미를 지닌 세기의 작품이 되었고 어느 순간 모나리자는 우리가 아는 희대의 걸작으로 유명세를 갖게 되었다.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그것이 모나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론을 할 수도 있다. 모니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그런 사회적 이슈 때문만이 아니라 새로운 회화기법, 신비로운 모델, 수수께끼 같은 미소 등등. 이러한 주장은 모나리자의 회화적 특성 때문에 모니라지가 유명해 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모나리자가 유명하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특성을 나열한 것 뿐이다. 마치 페이스북이 성공한 초창기에는 하버드 대학과 같은 명문 대학을 중심으로 한 폐쇄성이 성공 요인으로 지목되다가 오픈 플랫폼이 된 현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방성을 페이스북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 것과 동일한 논리적 순환오류이다.
소니 MD 사업 실패에 대한 상식 : 어리석은 의사결정의 본보기이다?
경영학에서 많이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는 소니의 어리석은 MD제품 출시와 이로 인한 실패이다. 90년대 초반, 소니는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MD 규격을 만들어 시장에서 배척되고 말았다.
정말 그럴까?
소니는 이전에 VCR 전쟁의 실패를 계기로 콘텐츠 유통의 중요성을 깨닫고 '소니 뮤직'이라는 음반사를 통해 자신만의 콘텐츠를 확보하였다. MD는 CD에 비하여 작고 가벼웠으며 재생뿐만 아니라 녹음까지 가능했고 내구성이 강해 무거운 CDP에 비하여 휴대용 기기로도 적합했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아도 MD는 대단한 성공을 하는 것이 분명한 것었지만 실제론 대단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HDD에 음악을 저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짜로 음악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실제 승자는 MD보다 한 발자국 늦게 시장에 진입한 애플이었다.
소니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에 최선을 다해 기술과 트렌드를 읽어가며 MD를 만들었다.
애플은 인터넷이 보급된 후 최선을 다해 기술과 트렌드를 읽어가며 아이팟을 만들었다.
두 전략의 차이는 가장 큰 차이는 사실 타이밍뿐이었다. 소니는 어쩌다 보니 안 풀렸고 애플은 어쩌다 보니 잘 풀렸다. 이 것이 전략의 역설이다. 전략적 실패의 주요 원인은 잘못된 전략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잘못 풀린 훌륭한 전략이다. 유명한 실패와 성공은 모두 선명한 비전과 대범한 리더, 그리고 치밀한 실행력이다. 여기에 집중과 헌신이 더해지면 애플처럼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동시에 소니나 노키아처럼 엄청난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훌륭한 전략의 대단한 실패는 순전히 최초의 비전이 세상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될지 미리 아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상식 :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성공을 만든다?
애플 이야기를 하였으니 애플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스티브 잡스는 너무나 엄청난 업적을 쌓아 비판 조차도 망설이게 만든다.
수만 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관리자가 일하는 한 회사 전체의 성공을 한 사람에게 안겨주는 것은 우리의 성향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몇 편의 영화로 제작될 만큼 사람들의 열광과 지지를 만들어 내는 신화에 가깝다. 10년 동안 회사 밖으로 밀려나 있던 잡스가 다시 돌아온 뒤 반전된 상황, 그리고 탁월성에 대한 집착은 스티브 잡스의 성공이 단순한 후광효과가 아니라는 것을 정당화한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정말로 엄청난 사람이고 이 모든 성공을 만든 사람이라면 그는 기업 세계에서 규칙이라기보다 예외적인 사람이다. '상식'에 기대면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 덕분에 '애플' 처럼 된 회사는 모래알처럼 많은 회사 중에서 '애플'뿐이다. (방금의 '상식적인 설명'은 논리적 오류 투성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기업의 실적을 좌우하는 것은 CEO의 행동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지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업계 및 경제 전체의 성과 같은 외적인 요인이다. 영감 있는 지도자가 유명한 이유는 심리적 편향과 문화적 믿은의 산물이고 영웅적 서사를 좋아하는 미디어의 선택이자 개인의 성취를 높이 사는 자본주의 문화의 산물에 가깝다.
구글이 90년대에 그들의 회사를 헐 값에 매각하려 했다는 사실, 스티브 잡스는 토이스토리가 나오기 전에 MS에 픽사를 매각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단한 지도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조금은 바뀔 것이다.
법 제도에 대한 우리의 상식 : 잘못한 사람이 처벌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좀 더 일반적인 상식까지 도전해보자. 우리는 음주운전을 하고 사람을 친 사람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조지프 그레이라는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던 중 도로를 건너던 24살의 마리아 헤레라와 16살 된 동생 딜시아 페냐, 그리고 4살 난 아들 앤디를 치어 숨지게 했다. 조지프 그레이는 15년 형을 받았고 여론은 15년 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이 조지프 그레이가 받은 15년형은 상식적으로 정당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적어 보이기까지 한다. 음주운전을 하고 사람을 친 것은 사실상 살인과 동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적은 형량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닐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100명의 사람들이 모두 음주운전을 하고 서로 다른 날 똑같은 길을 운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어느 날은 도로에 사람이 있었고 마침 그 날 운전한 사람 - 조지프 그레이 - 은 사고를 내고 사망자가 발생한다.
그럼 마침 도로에 사람이 있었던 날 운전했던 한 사람인 조지프 그레이는 다른 음주운전자 99명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머지 99명보다 더 나쁜 사람인가? 아니면 아무런 형량을 받지 않은 나머지 99명도 15년 형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15년 형을 그 100명이 모두 함께 분담해야 하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정의 역시 실제로는 '운명의 장난'에 의한 것이다. 단순히 운이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지만, 운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형벌을 받지 않은 99명과 15년 형을 받은 조지프 그레이의 책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법은 사태의 결과에 대해서만 처벌한다. 음주운전을 하는 그 과정이 아닌 결과에 대해서만 처벌받는 것이 우리가 주장하는 정의 일지는 논리적 난제에 가깝다. 다른 대안이 없을 뿐이지 결과만으로 처벌하는 우리가 믿는 정의관은 굉장히 모순적인 것일 수 있다.
자신부터 의심하라
이런 사례들을 통해 밝히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과 상식이 아무런 의심과 검증 없이 믿을 만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단순화하고 싶은 욕망과 사회적 통념에 저항하지 않는 이상 나아지는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질문하였고 이윽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모른 다는 것을 아는 자신이 더 현명하다는 판단을 하고 철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지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답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