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나무가 울창한 숲이 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려졌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쓰러질 때 소리가 났을까?
현상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답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실존주의자들에게는 말이 되는 소리이다.
샤르트르는 현상으로서의 실재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하는 것은 나무가 어떤 사람 앞에 나타나 '아름다운 나무', '커다란 나무', '흉측한 나무', '오래된 나무'라는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 나무 그 자체는 어떤 나무와도 구분할 수 없는 획일적 존재(undifferentiated being)이기 때문에 그 나무는 단지 거기 있을 뿐 개별적인 나무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요약하면 획일적인 존재는 '의식'에 의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개별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획일적 존재를 개별적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은 우리가 그 사물과 마주하는 방식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며 위로를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우리가 끊임없이 해석해야 할 대상이며 우리의 생각과 의도, 삶의 방식과 기준에 따라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람에게 세상은 놀이터가 되는 것이며 자신감 넘치는 사람에게 인생은 모험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의 의식이다.
*동시에 이제 우리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 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