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부 “겨울” 에필로그

영배의 미소는 해인과 닮아 있었고, 춘길은 그게 참 좋았다.

by 두밥

중랑천에서 두 노인이 자전거를 탄 지 정확히 2주가 흘렀다. 쌍문동에 봄이 찾아왔다. 춘길은 식탁에 반찬 접시를 하나씩 놓으며 지난 아침을 떠올렸다.


해인이 어학연수를 마치고 새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아이는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영배에게는 짐짓 거만하게 나 아니면 어쩔 뻔했냐는 물음도 던졌다.


해인이 영배의 집에 찾아오는 토요일이 되면 둘은 춘길의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함께 올랐다. 하루는 산에 오르고 하루는 아늑한 카페에 가고 하루는 골목길 안쪽 식당가를 탐방했다.


그날 오전은 특별한 날이었다. 영배에게 선물 받은 동요곡집을 춘길이 다 연습해 왔다. 두 노인은 해인에게 깜짝 공연을 해주기로 계획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오후 햇볕을 만끽하며 해인은 발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아이의 왼쪽에서는 영배가 통기타를 딩기딩기 튕기고 오른쪽에서는 춘길이 부드럽고 잔잔한 곡조를 불렀다.


춘길은 그런 시간이 영배가 아주 오랫동안 꿔왔던 꿈의 일부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가 즐기는 기색은 알아차렸다. 또 동요곡집에 작게 적힌 숫자 ‘1’을 발견한 참이었다. 그래서 다음 공연을 그 자리에서 약속했고 영배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눈에 담아뒀다.


춘길은 그 미소를 알았다. 아직 추워지기 전, 나뭇잎이 물들고 다람쥐가 오동통해질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춘길은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그는 벗은 장갑을 어디 둘 겨를도 없이 밖으로 나가봤다.


초등학생 정도일까. 분홍색 점퍼를 입고 머리를 높게 한 갈래로 묶은 아이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진 자전거와 반바지 아래 까진 무릎이 이어서 눈에 들어왔다.


춘길이 다가가자 아이는 창피한지 얼굴을 문지르며 울음을 멈췄지만 딸꾹질까지 막지는 못했다.


“애야, 이름이 뭐니?”


“해인이요.”


“자전거 타다 넘어졌구나. 부모님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니? 전화 걸어 줄 수 있단다.”


고개를 저어대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해인은 손을 서둘러 감쌌다.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혼자서 잘 들어갈 수 있겠니?”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춘길은 신중하게 살폈다.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손이었다. 무릎보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심하게 까져 있었다. 학교 가서 연필을 잡으면 아플 텐데. 밥 먹을 때 젓가락질 해도 아플 텐데. 무얼 해도 손이 쓰이는데 그때마다 아플 것이다.


춘길은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손 한 번 줘보겠니?”


해인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춘길이 예상보다 단단하게 쥐자 놀란 기색으로 그를 한 번 쳐다봤다. 춘길은 밀려드는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해 온화한 표정을 내보였다.


“어?”


손바닥에서 상처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해인이 숨을 들이켰다.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에서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춘길은 손을 소매 속으로 숨겼지만 이미 아이가 본 뒤였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얼른 들어가렴.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괜찮으세요?”


춘길이 돌아보자 해인이 오히려 걱정스럽게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이제 할아버지가 아프잖아요.”


“괜찮아. 이런 상처는 금방 낫는단다.”


춘길은 이후에도 안심시키는 말을 몇 마디 더 했다. 상처의 고통이 심해서 그때의 기억은 흐렸다.


해인은 할 말이 남은 듯 미적거렸다. 그러다 아이 특유의 비장한 표정으로 춘길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 물어보렴.”


“할아버지는 마음의 상처도 낫게 해 줄 수 있나요?”


아이가 무슨 질문을 하든 적당히 둘러대고 돌아가려던 춘길은, 상처의 욱신거림도 잊고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해인이가 아픈 거니?”


“아뇨, 우리 할아버지가요. 의사 선생님이 우리 할아버지는 마음이 아픈 거랬어요. 맨날 슬프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대요. 마음을 심하게 다쳤다고요. 그런 상처도 낫게 해 줄 수 있나요?”


아이는 너무나 간절해 보였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중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는데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춘길은 그날 그가 무슨 일에 뛰어드는지 전혀 몰랐고 안다 하더라도 제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진심을 단어에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이렇게 금방은 아니지만, 해인이 할아버지도 나을 수 있게 노력해 볼게. 약속하마.”


“감사합니다!”


해인이는 크게 외친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행복을 너무 즐기면 서둘러 떠나버릴까 봐 소중히 여기는 미소였다.


영배의 미소는 해인과 닮아 있었고, 춘길은 그게 참 좋았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해가도 영배가 미소 지을 일은 앞으로 계속 생겨날 것이다. 춘길은 그렇게 믿었다. 해인에게 한 약속을 그는 오래도록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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