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 좀 어렵지만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가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그림자가 절실하다. 환대받지 못하는 곳에서 적절한 장소도 부여받지 못하는 인간들의 운명은 비참하다.
여행자는 그림자가 필요하지 않다. 어디에 속하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고 떠돌아다니면 되기 때문이다. 어디엔가에 속하지 않는 삶. 책임과 의무가 없지만 동시에 사람 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삶. 어떨지 상상이 잘 되진 않는다.
여행 초반에는 체력도 있고 낯선 장소의 매력에 빠져들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여행을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감흥이 처음보다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집 생각도 나고 일상이 조금은 그리워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된다.
7.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여행자가 보내는 신뢰는 환대와 쌍을 이루고 있다. 신뢰를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환대를 바랄 수는 없다.
지금까지 여행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좋지 않은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게 되지 않는다. 도움을 주려고 할 때도 우선 경계부터 하게 되며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의도로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게 되기 어렵다.
잘츠부르크에서 야경을 보러 전망대에 올라간 날, 야경 전망으로 유명한 곳 치고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중 한 명이 나와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별 의심 없이 내 핸드폰을 건넸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는 그 순간 핸드폰을 갖고 달아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엄마도 역시나 여러 일을 겪으며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경계와 걱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신뢰와 환대의 선순환 속에서 여행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무조건적인 신뢰만을 하기엔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이 많다. 그래서 슬프다.
다행인 점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여행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도시 간 이동을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나 무겁고 큰 캐리어였다. 기차로 이동하는 일정이라 힘겹게 기차 위로 캐리어를 올렸는데 캐리어를 놓아두는 짐칸도 2층에만 자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건 올리지 못하겠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앞에 있던 한국인 커플이 나서서 도와줬다. 내리는 역도 같아서 고맙게도 내리는 것까지 도와줬던, 기억에 남는 커플이었다. 그렇게 한번 보고 말 줄 알았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체크인을 하는 줄에서 또 만났다. 우리는 미리 인터넷으로 체크인을 해서 짐만 부치는 줄에 서있었는데 그 커플은 미리 안 해왔다며 어느 줄을 서야 하는지 우리한테 물어봤고 안내를 해줬다. 체크인까지 해야 하는 줄이 너무 길고 처리가 빠르지 않아서 탑승시간까지 촉박한데도 출국 심사 줄에 모습이 보이지 않아 엄마와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걱정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지만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고 비행기 안에서도 한번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별일 아니지만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다른 한국인들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커플과 우리 사이에 어떤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한다.
8. 노바디의 여행
나 자신 자체로서 특별하게 분류되는 것이 아닌 인종이나 국가 등의 스트레오 타입에 의해서 분류되는 시간.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가 되어 여행하는 시간.
노바디와 섬바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속하고 싶은가.
-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사이에서/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는 섬바디가 되고 싶어 진다. 같은 인종, 국가, 단체라는 속성에서 벗어나 그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다.
- 관광지에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더 편해진다. 노바디가 된 것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서서 똑같은 풍경의 사진을 찍고 함께 감탄하며 새로움을 느낀다. 그 속에서 나 또한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행 중에 쓰는 다양한 가면, 페르소나
>>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여행지에서는 그저 이런저런 범주에 따라 분류될 뿐이다. '예의 바른 무관심' 정도가 현지인이 여행자에게 주는 적당함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나는 노바디 중에서도 노바디일 뿐. 섬바디로서의 타인의 인정을 바라기에는 그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한 시간이 너무 짧다. 노바디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일상 속에서 나의 정체성, 존재가 너무 뚜렷해질 때가 있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 회사에서의 직급 등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역할을 하며 그렇게 정의 내려진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된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정체성도 여행을 떠나는 순간 나는 '노바디'가 되어 누군가의 딸도, 어딘가의 직원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여행하는 순간. 그 순간의 기분은 이상하면서 동시에 새롭다.
9. 여행으로 돌아가다
>>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6개월 동안의 교환학생 시절, 어떻게 보면 긴 여행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를린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살았고 학생증 덕분에 오고 가는 교통비가 무료였음에도 베를린을 제대로 여행한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주요 관광지는 다 가보긴 했지만 베를린을 가는 것이 하나의 일상이 되어 익숙해진 기차역과 주변 쇼핑몰 정도만 다녀오는 정도의 루틴이 반복된 것이다. 떠나는 날이 다가와서야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리스트를 만들면서까지 베를린 여행을 다녔다.
어떻게 보면 여행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현지인스러운 일상생활을 했다고 볼 수 도 있겠다. 다만 그 일상이 너무나 당연한 나날들로 느껴지고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뿐이다.
이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여행이었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내가 지향하는 삶이지만 참 어렵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까지 공감되고 와 닿는 문장과 단어들로 가득했던 책.
'여행을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여행'이 얼마나 간단하지 않은 주제인지 깨달았다. 물론 글의 범위나 깊이는 작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여행'이라는 주제만으로 이 정도의 책을 써낸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작가가 여행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하며 지금까지의 여행 내공을 다 쏟아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하는 이유를 단순하고 단편적으로 몇 가지 뽑아내어 그것에 대해 써보려고 했던 나에게 여행에 대해 더 다양한 관점과 깊이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