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가방과 멍 때리기

여유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자

by 도르유

1년에 한 번, 회사에 공가를 쓰고 건강검진을 받는 날. 일부러 금요일 아침으로 검진을 예약하고 오랜만에 일 없는 평일을 보내기로 한다.


저녁에는 거의 1년 만에 보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해서 큰 마음을 먹고 작은 가방만 달랑 들고 나와봤다. 9시에 시작한 건강검진은 간단하게 1시간 만에 끝나버렸고 오래전에 예약했던 다른 병원으로 가기 위해 검진기관이 위치한 공덕에서 노원까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되돌아왔다.


도착하니 11시. 우선 허기지니 밥부터 먹자. 예약한 병원 옆의 맥도널드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건강검진을 하고 나면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이 땡긴다. 작년엔 맘스터치, 올해는 맥도널드다. 나의 패스트푸드 선호 순위에서 치킨과 피자 다음으로 밀려있는 햄버거는 역시나 처음엔 맛있지만 뒤로 갈수록 얼굴이 붓는 느낌이고 배는 더부룩하다. 게다가 물티슈 제공이 안된단다. 끈적이는 손을 휴지로 겨우 닦아본다. 양심적으로 감자튀김은 남긴 채로 식사를 마친다.


병원 예약은 오후 2시. 패스트푸드답게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시간은 12시 반. 예약시간까지 최대한 버텨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매장 내 사람들 소리에 일단 도망치듯 나왔다. 병원에 들어가 대기하겠다고 하고 앉아 책을 읽는다. 작디작은 가방에는 아이패드는 물론이고 작은 책 한 권조차 들어가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핸드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예상한 상황이지만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작은 화면 속 깨알 같은 글씨 때문인지, 아침부터 서두른 탓인지 대기 소파에 앉아 꿀잠을 버렸다.


진료를 마고 나오니 2시 20분. 저녁 약속은 7시, 여의도. 무려 4시간이 넘는 시간이 붕 떠버렸다. 자, 우선 계획했던 동선대로 아까 갔던 맥도널드 옆 스타벅스로 들어가자. 부족했던 카페인을 보충하며 폰으로 무엇이든 하자.


커피를 앞에 두고 폰을 만진다. 너무 답답하다. 긴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은데 폰으로 책을 읽어도, 리포트를 읽어도 집중이 흐트러진다. 어쩌면 이 모든 기분과 느낌은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핸드폰이 얼마나 좋은데,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징징거리다니.




대학생이 되면, 아니 취업을 하면 작은 가방을 디폴트로 들고 다니게 될 줄 알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나 보다. 주말이 돌아올 때마다 기본 두 개의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멘다. 그 안엔 노트북과 아이패드, 책이 언제나 들어있다. 무거운 가방을 멘 어깨는 빠질 것 같고 뻐근하지만 왠지 모르게 든든한 기분이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군이 옆에 있는 것 같다.



작은 가방만 달랑 들고 나온 오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면 어떡하지, 이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버릴 수는 없어! 이동하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달달 볶으며 효율적인 동선을 짜고 짬짬이 할 일을 생각해둔다.


나도 참, 빡빡하게 산다.


나도 모르게 멍 때리다가 든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멍을 때려본지도 오래된 듯하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본 적이 왜 이렇게 오래됐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가 가장 어렵다. 누가 보면 세상 가장 바쁘게(바쁜 척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줄 알겠다. 실상은 할 일이 쌓여가고 결국 나중으로 미뤄버리고 있는데 말이다. 몸과 마음의 속도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조급하고 무언가로 꽉 차있어서 잠시라도 비워두지를 않는다. 덕분에 해야 할 일을 빠트리지 않고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걸어가다가 멋진 풍경을 보면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바라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질타를 스스로에게 보내고 싶지 않다. 지만 런 마음이 들어갈 자리가 도무지 나지를 않는 나날들이다.


작은 가방을 들었다면 줄어든 무게만큼 마음의 욕심도 조금은 내려놓아보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단 함께 걸어가며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보자. 무엇을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비록 지금도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글을 쓰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몸이 속도를 더 낼 수 있다면 마음이 가는 대로, 지친 듯하면 몸을 기다려주며 몸과 마음 모두를 잘 챙기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




사실 잘 알고 있다. 이 글에서 내린 결론이 무색할 정도로 내 모습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라는 걸. 소망과 다짐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비슷한 일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글로 내 마음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과 모른 채 외면하는 건 엄연히 다르기에, 글을 써 내려가며 한동안 방치해두었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글을 마무리하고 보니 어느덧 시간은 6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다. 슬슬 짐을 챙겨 여의도로 출발해야겠다. 머릿속에서는 어김없이 1시간 동안 무얼 할지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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