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 기록

5월, 가정의 달에 하얀 거짓말을 하게 되는_마음

갑작스레 맞이한 새로운 역할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 들뿐

by 도르유

어느 한가로운 주말, 무엇이 문제였는지 갑작스러운 종아리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다리에 쥐가 났나 싶었지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었고 발가락 끝까지 아파오는 게 심상치 않았다. 본가가 아닌 자취방에 있었기에 그저 혼자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다행히 토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일요일 하루 동안 상태를 보며 요양하는 시간을 보냈다. 예전 같았다면 어디가 아프고 다쳤을 때 전화를 해서라도 부모님께 알렸겠지만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웬만한 일에 대해서 특히 그게 좋지 않은 소식라면 말씀드리지 않게 되었다. 당장 부모님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일을 괜히 알려 걱정만 끼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특수 사혈까지 해보며 컨디션 조절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조심해야 하는 허리 부분부터 다시 안 좋아진 듯하다. 허리와 골반, 무릎까지 상태가 좋지 않다. 그렇게 아픈 상태에서 돌아오는 주말, 본가에 갔다.


최근 부모님 두 분이서 멀리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엄마는 무릎을 다치셨다. 3주 넘게 반깁스 생활을 하시며 직장도 잠시 쉬고 계신데 다행히 아빠가 집에 계셔서 집안일을 챙기신다. 엄마가 한창 취미 생활로 베이킹을 하셔서 빵을 사갈 필요가 없었는데 한동안 빵을 굽지 못하니 오랜만에 빵 플렉스를 하며 한가득 사갔다. 집에 오면 이것저것 잘 챙기면 좋겠다는 아빠의 당부를 되새기며 집에 도착했고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허리와 다리가 좋지 않다는 건 당연히 말씀드리지 않았다. 하얀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움직이지 못해 심란한 엄마와 그 옆에서 묵묵히 집안일하시는 아빠께 걱정 한 덩어리를 더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아침, 깨어난 아빠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평소 웬만한 일로는 몸이 안 좋다고 말하지 않는 아빠의 거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자는 도중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아서 잘 자지 못하고 깨어난 지금도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셨다. 너무 걱정이 됐다. 여러 어지럼증 증상과 원인을 찾아봤지만 딱 맞는 원인은 찾지 못했다. 일단 아빠가 푹 쉴 수 있도록 나머지 자잘한 집안일들은 내가 처리했다. 출발하는 시간도 저녁 식사 후로 미루고 엄마가 해달라는 일은 군말 없이 바로바로 했다. 그러다 모두가 각자 쉬는 시간에 나도 잠시 쉬다가 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계획했던 일을 다 하진 못했지만 매일 이렇게 챙길 수 없기 때문에 집에 와있을 때라도 잘 챙기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됐다.



예상치 못한 감정의 동요는 저녁 느지막이 터져버렸다. 저녁 준비를 하기 전, 미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한마디 한 것이다. 아빠 컨디션이 좀 괜찮아지시긴 했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아빠가 움직이기 전에 알아서 저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거 아니냐고.. 뭐라 할 말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출 준비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저녁 준비가 되는 동안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을 하는 행동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워졌던 것이다. 기분이 상한 엄마 앞에서 허허 웃으시는 아빠께 죄송했다. 동시에 조금은 서운했다. 직전까지 군말 없이 수발을 들었던 게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스스로 부끄러우면서도 서운했다. 나도 지금 아픈데.. 걸을 때마다 무릎이 아프고 골반까지 이상한 것 같은데.. 아픈 것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건데..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내 마음은 몰라주는 것 같아 슬펐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답답한 엄마와 힘들어도 힘들다고 잘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아빠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복합적인 기분이 들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 그러니까 부모님의 몸이 다치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일이 앞으로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이 자주 있을 텐데 과연 나는 그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돌봐주시던 부모님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부모님으로 바뀌어 가는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칠 수 있을까. 나만 생각하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거둬들이고 부모님을 향해 온전히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듯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그런 ‘어른의 모습’이 요구되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마음이 아팠다.


60대를 바라보는 부모님과 30대를 바라보고 있는 딸.

각자가 맞이하고 있는 역할과 모습의 변화는 갑작스럽고 어색하기만 하다. 새롭게 부여받은 역할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하다. 과연 이 옷을 내가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서로 지금보다 더 나이 들었을 때를 가정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이런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이제는 어디가 다치고 아프면 부모님한테 말하고 싶은 마냥 어리광 부리는 딸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될 것 같다. 오히려 부모님의 컨디션을 먼저 잘 살피고 챙기는 어른이 된 딸의 모습을 장착해야 할 것 같다.


쉽지 않겠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한 번에 충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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