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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Dec 04. 2023

우리 사진들 속엔 웨딩사진은 없다.


예전에.. 란 말 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엔 이랬었는데 하며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말들. 솔직히 거북하다. 그럼에도 예전에 란 말을 나 역시 잘한다.



얼마 전 우연히 웨딩드레스 입은 모델의 모습을 보았다. 난 웨딩드레스 하면 슬픈 마음부터 먼저 든다.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서일까. 난 첫 번째 실패로 인해 병원에서 생을 오가고 있을 때, 오빠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다리지도 않고 나를 위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모든 웨딩드레스 입고 찍은 사진을 액자는 부수고 작은 사진부터 큰 사진까지 모조리 불태웠다. 아쉽지는 않다. 다만 내 사진.. 반쪽이라도 있었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있었다. 이젠 기억에서 조차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3년만 더하면 이제 10년이 되는 옆지기와 합칠 때... 결혼식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부끄러웠다. 젊잖게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아이계획도 늦은 나이라서 일찌감치 의논해서 안 낳기로 했었다.
우린 중학동창으로 이렇게 일치하기도 쉽지 않을 테지만 아버님은 양가모두 소천하신 상태였고, 양가 어머님 형제자매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는 일도 없고 서로의 이유는 달랐지만  닮아 있었다. '행복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은 나름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가족은 이제 우리 둘 뿐이다.




웨딩드레스 입고 스냅사진만 몇 장 찍고 둘 다 간단히 정장 같은 것을 입고 친한 지인 친구 몇 명만 모시고 식사만 조촐히 하려 계획하고 문구를 생각해 내며 조금은 창피해하다가도 행복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스친다.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예약을 취소하고 위약금을 물고 언젠가 찍을 날을 기대하며 모든 일들을 미루고, 우린 당장의 처해진 일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소송과 옆지기의 크게 도진 병의 치료에 모든 정신을 모았다.



벌어놓은 돈은 점점 썰물처럼 사라져 갔고 우린 그 큰 일을 몇 년에 걸쳐서 해결하려고 온 힘을 쏟았다. 남편은 중간중간 영동세브란스 병원을 주기적으로 오고 가야만 했다. 그냥저냥의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도 3년 여 동안 못 하고 있다. 다른 것들의 갈급함과 남편의 굳은 고집 같은 책임감으로.



그때 서로 의논을 했었다. 무슨 수로 일일이 표현을 하겠는가. 아직은 옆지기의 사회생활에 혹여나 영향을 미칠까 하는 기우에 1~2년간은 옆지기 주변에 알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경제적인 현실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물론 심장이 쿵쿵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3년이 지났고 거기에 더해 코로나와 함께 남아 있는 나의 힘이 없어져 갔다고 말해야 맞는 것인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몸도 그렇고 몇 년 조금 더 일찍 은퇴했다 생각하기로 하고 남편의 주변에 알렸다.

나의 지인들이 이미 떠나간 지 오래고 나를 아는 진정으로 남을 이들은 남아달라 하지 않아도 곁에 조용히 있어주었다. 그 이 후로는 옆지기와 함께  아니, 남편이 필사적으로 생활을 위해 노력했다. 누구의 노력이 먼저이고 더하고 빼기의 말이 아니라 우린 그러했다.




다들 SNS에 우리의 별것도 아닌 일상의 글 하나만 올려도 50여 개의 좋아요. 가 순식간에 달렸던 때완 다르게 현실의 어려움을 남편도 나도 굳이 표현하려 하지 않아도 사막의 모래언덕이 한순간의 바람에 지형지물이 변하 듯 확연히 흩어지며 사라 젔다. 물론 SNS의 '좋아요' 수 따위 상관없다. 다만 인간의 간사한 본능이랄까 뭐 그런 것을 뼈저리게 사무치게 그리고 치사하게 느끼고 배웠고 깨달아갔다.




요즘의 우리는 최소한의 가성비를 생각해서 50이 넘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쥐어 짜내어 먹는 한 끼와 하루의 숙박 그리고, 심지어 마시는 물까지 걱정하는 상상조차 못 할 만큼 현재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버티고 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버거웠고 힘들었고 오해도 부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옷을 잘 입는 조금 아주 조금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 옷을 걸치든 그냥 옷을 걸치든 옷 잘 입는 사람이란 말을 들었고,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던 탓인 지 그냥 내 성격인 건 지 누군가를 꾸며주고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을 진심으로 뿌듯해했고 내 주변의 사람이 힘든 것도 기가 죽는 것도 싫었다. 동생 언니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써서 좋았던 것을 쇼핑백에 비누가 되었던 바디로션이 되었던 영양제가 되었던 심지어 옷까지도 나누기를 자주 했던, 그것이 어떤 마음인 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짠하고 어쩜 오지랖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왔었던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서운해하기도 했었다.

이 조차 미련과 생색임을 어느 순간 깨달았고 나를 뒤돌아보았다. 과연 그것이 서운해할 일인 것일까.

그때의 내 마음이 작게나마 행복했고 그저 내가 좋았으면 그뿐인 것이다. 란 생각이 꽉 막힌 사람처럼 몇 년이 지나서야 반성했었다.



나의 청년시절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모자를 엄청 좋아했었고 20대 때는 괜히 눈치 보며 못 썼는데 40대부터는 누가 보든 그냥 썼다. 아니면 평생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 듯해서.




그러나 나와 우리 사진들 속엔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은 없다. 옆지기와 아주 크게 싸웠을 무렵엔 혼인신고만 하고 재혼했다는 소식은 친구들이 모두 알지만 웨딩사진도 조촐한 상대의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조차 없었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심하게 싸울 때는 그런 못나고 유치한 생각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아직은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

50이 넘은 여자도 여자니까. 그리고 옆지기와의 남은  동행에서 결혼사진 한 장 정도는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은 다 창고에 있어서 옷을 찾아 올 수가 없다. 겨울이 더 부담된다는 말이 참 그냥저냥 생긴 말은 아닌  것을 몸으로 느낀다. 초라함이 한층 더 추레하게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그런 따라붙는 마음조차 털어낸다.



50대라는 나이가 그런 것일까 아님, 긴 긴 터널을 지나오느라 생긴 후유증일까. 난 나대로 아프고 그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남편은 몇 달 사이에 16kg가 빠져서 차마 보기에도 안쓰러운 겨울나무 같은 마르고 건조해진 휘고 튀어나온 뼈만 남았다. 그런데 난 철없다는 말이 민망한 50이 넘은 나이에 웨딩드레스 얘기나 하고 있다.




하얀 비니를 쓴 것 마냥 폭발하는 새치와 너무도 긴 머리를 질끈 묶고 교복처럼 매일 입는 검은 옷의 초쵀한 지금의 나는 "예전"이라는 말을 싫어하면서도 예전 앨범 속 몇 년 전 우리의 사진을 보려 한다. 그리고 다시 얼마 남지 않은 약속의 날을 위해 마음속으로 파이팅 해본다.




2018년 앞으로의 길을 다짐하며.  

2019년 명동성당 앞에서.

2023년 몇달사이 16kg가 빠진 남편.

    (_ 우리에게 키다리 아저씨처럼 초겨울 외투를 선별해서 정성스럽게 보내주신 분께 그 옷을 입고 보낸 착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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