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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n 25. 2018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8살의 나로 돌아간다면

성적 모욕감을 느꼈던 순간에, L의 사타구니부터 발로 차 버릴 거예요.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했던 사회생활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후회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일이 있었어요.      


졸업과 동시에 취업준비생으로, 여러 군데 지원을 한 끝에 종교매체 제작하는 일을 외주로 하는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어요. 인턴이 끝나고 정직원으로 바뀌는 시기가 오니, 회사는 월급 줄 돈이 없다며 4개월만 부려먹곤 채용을 하지 않더라고요.      


학과 조교 일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사무실에서 학생들과 교수님의 업무 보조를 하며 지낼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생명의 은인처럼 잘렸던 회사에서 만들던 매체가 본사로 들어가면서, 원래 일을 하던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서 8년 넘게 있을 줄 몰랐지만 그렇게 종교 관련 회사 ‘ㅎ’에 입사했어요.      


20대 초반에 막연하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취업이 되니 세상을 모두 얻은 것만 같았어요. 해야할 일이 혼자서 하는 업무가 아니라 디자인팀과 광고팀, 기획팀이 협력해야 하는 일이라 20년 경력의 편집과 홍보담당을 하는 중년의 L을 선임으로 만나게 됐죠. 회사 입장에선 전 사회생활을 처음 하는 햇병아리였으니까요.  


수장이라며 사진을 찍어두었던

L은 롤모델로 읽었던 매체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기획력도 좋아서 히트시킨 책과 저자 발굴도 탁월한 사람이었어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니 배울 게 많을 거라 생각했어요. 수습 3개월은 어떻게든 버텨서 꼭 정직원이 되겠다는 간절한 목표도 있었고요.      


어느 날, 마감을 하고 선임인 L이 저녁을 사준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L을 존경하는 인생 선배처럼 생각했으니 당연히 오케이를 했죠. 우리는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었어요. 기독교인이었던 L은 배부르게 설렁탕을 다 먹더니, 자신은 정 힘들고 어려울 땐 소주를 한잔씩 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약간 의아했죠.      


어두운 자동차 안, 밤이라 캄캄한 도로,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는 모텔의 간판들은 20대였던 저에겐 낯설고 약간은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어요. 신앙인에게 술은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힘들 때 L이 한잔씩 마시는 소주 이야기를 내가 왜 들어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에 빠져서, 사실 정신이 멍해 있었어요.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뜻하지 않게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버렸어요. L은 이미 취한 사람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는 듯 했어요. 현란한 네온사인의 모텔을 지나면서 자신은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종종 아내랑 모텔을 간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더군요. 당시 미혼이었던 제가 꼭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사진 = pexels


밀폐된 공간에서 시작된 공포심은 점점 실체가 있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어요. 어디에서 밥을 먹었는지 처음 가본 장소였기에 차로 데려다준다는 L의 이야기만 듣고 단둘이 있었던 그 시간이 24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어요.      


집 앞에 거의 다 와서 L은 나이가 들수록 외롭다며 자신의 손을 한번 잡아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약간 멈칫 했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 형제자매들끼리 둥글게 손잡는 일이 많으니까 손잡는 것쯤이야 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손이 참 부드럽네’라는 말을 덧붙이니 빨리 내려야겠더라고요.      


다음 날 출근해서 담당 팀장님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알렸어요. 팀장님도 처음 겪는 일이고, 제가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L이 대표님에게 이야기가 들어가면 자기 잘린다며 살라달라고 했기에, 그 일은 미지근한 물처럼 처리됐어요. 저는 L에게 사과를 받았지만 단 둘이 있을 땐 그날의 일이 떠올라 공포감을 느꼈어요. 또 그렇게 하지 말란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L은 자신이 일하는 층의 회의실 문을 활짝 열고 나를 불러 사과했어요. 미안하다고요. 하지만 그날의 공포심은 둘만 남겨지는 상황과 환경에 처할 때마다 저를 괴롭혔어요. L과 같은 층에서 일하지 않으니까 일 관련 컨펌을 받으러 담당자인 제가 내려가야 할 때면, 죽기만큼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요.


L이 메신저로 물어오면 한참 있다가 내용을 확인했어요. L은 충분히 사과를 했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 나름 어른이었으니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더군요. 팀 분위기 고양을 위해 회식을 잡거나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도 L은 괜찮아 보였어요. 저만 유난 떠는 사람처럼 긴장하고, 싫은 내색을 드러내는 안하무인이 되었죠.

  

회사에서는 저 혼자 매체 만드는 일을 하도록 맡기기엔 무언가 미더웠는지 계속 L과 함께 일해야 했어요. 일뿐 아니라 아침마다 종교행사에서 L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직장 안에서 성희롱 교육을 받을 때면 코웃음이 나왔어요.


L은 저에게 존경하거나 배울만한 사수가 더 이상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일은 담당팀장과 디자인팀 대리 그리고 저만 알고 있는 상황이라, 같이 일하는 팀 분위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어요.      


ㅎ에서 오래 일했던 동료들은 월간회의 때마다 저와 원수처럼 부딪히는 L때문에 매월마다 곤혹을 치뤘어요.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생각하며 넘겼던 상황들이 전혀 괜찮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이미 회사에선 저라는 존재는 트러블메이커가 되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로 L이 퇴사하기 전까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버티며 지냈어요. L과는 일만 굴러가게 한 달에 4번 정도만 마주치면 되고, 마감이 있는 일을 하다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더라고요.


바빠서 잊고 매일 퇴근하고 운동하면서 풀고 심리상담도 받으면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아픈 부위가 아무는 것처럼 인식되고, 점점 무뎌진다고 생각했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싶었어요.     



왜 퇴사를 하지 않았냐고요? 왜 더 윗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냐고요? 인턴이었으니까요.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저에게 일어났던 일도 그럴 거라고 여겼어요. 미봉책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해결된 것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L이 몇년 전에, 그날의 일로 퇴사를 했어요. 그 때 꽁꽁 숨겨놓았던 진실을 알게 됐어요. 저 말고도 L은 성적인 문제를 일으켰던 요주의 인물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됐네요. 사회생활하면서 L와 같은 부류를 다시 만난다면, 마음 같아선 사타구니부터 발로 짓밟아주고 싶은데요.


희롱하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증거를 확보한 후, 바로 회사 대표에게 이야기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거예요. 절대로 같이 일을 한다거나 한 공간에서 보는 일없게 저 자신을 지키고 싶어요, 아파도 직면하면서, 버티는 사회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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