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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an 13. 2019

환상의 공동체, 가족

지금까지 외할아버지라고 철석같이 믿고 지내왔는데...

“언니,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대.”

11월 마지막 날 오전, 나는 둘째 동생으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을 들었다. 나는 종종 외할아버지를 부양하는 엄마의 어깨가 무겁다고 느끼고 있었고, 89세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가셨다고 생각했다. 슬픈 감정은 뒷전으로 밀리고,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나는 어떻게 고향에 내려갈 것인지 고민했다. 


주말이라 아기와 함께 갈 수 있는 기차는 대부분 매진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까 싶었지만 카시트가 없고 3시간 30분 동안 아기를 안고 가야 하기에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미제사건처럼 풀리지 않는 일이 남편과 셋째 동생 사이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결국 나는 둘째 동생과 단둘이 고향인 여수로 향했다. 종일 붙어있었던 아기를 두고 둘째 동생과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은 짜릿했고 홀가분했다. 교통사고 사건으로 셋째 동생과는 연락하지 않고 지내다 여천역에서 두 달만에 얼굴을 봤다. 동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도 얼굴 볼 낯도 없고 쑥스럽지만 먼저 아무 말이나 걸었다. 셋째 동생은 “야, 넌 택시 타고 와라”며 말했지만 우리는 함께 사고가 났던 차로 함께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사고 트라우마로 동생이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그건 내 착각이었다. 지나치게 운전을 잘해서 솔직히 놀랐다. 여수전남병원 옆 장례식장 가는 길. 장례식장에 가는 길목은 어두침침하고 우울하다. 이곳도 어김없이 낡고 허름한 곳에 위치해있다. 이승을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환하게 배웅해 줄 순 없을까 하는 잡념에 빠졌을 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봐야 했다. 


TV 모니터 화면에는 익숙한 외할아버지 얼굴이 사진으로 나왔고 그 옆으로 잘 모르는 이름들이다. 작은 외삼촌 이름만 상주에 들어있고 나머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심지어 손주들까지도 나는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우리 엄마랑 큰 외삼촌 이름만 없었다. 물론 손녀인 내 이름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간 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설명해야 하는 가족사를 남편에게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현장에서 팩트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셋째 동생은 엄마랑 큰 외삼촌 이름이 적히지 않은 모니터 화면을 보고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30대 중반까지 살면서 외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계셨고, 간암으로 외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엄마와 큰 삼촌은 외할아버지를 아버지니까 봉양하며 사니까 그런 줄 알았다.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지만 중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왜 작은 삼촌이랑 성이 다르냐고 질문했었다. 외할머니가 재혼하셔서 그렇다고만 알았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관계라는 건 89세였던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간 날 마주하니, 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갔는데 직장 동료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예의상 가야 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부조금을 챙겨갔는데 엄마와 성이 다른 작은 삼촌은 내지 말라며 마다했다. 외할아버지 호적에 올라간 자식들 쪽에서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유일한 외할아버지 직계가족으로 인정받은, 상주인 작은 삼촌과 맞절을 나눴다. 작은 삼촌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처럼 나도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바닥과 손바닥, 무릎과 두 발이 밀착할 때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읊조렸다. 외할아버지 죽음이 실감이 나서 슬펐지만 울진 않았다.  


작은 삼촌 말에 따르면 나는 첫째 손녀라서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바다에 낚시하러 가서 싱싱한 생선을 잡아오고, 명절 때마다 산적을 잘 부치는 모습으로만 기억한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건강하셔서 돌아가시긴 할까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외할아버지 집에 결혼하고 방문했을 때, 소변을 지릴 때 나는 쾌쾌한 냄새가 할아버지 안방에 가득했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아기를 낳고 친정집에서 몸조리를 한다고 갔을 때 아기가 백일이 지나면 가야지 싶었는데 외할아버지에겐 손녀였을 아기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까지 외할아버지라고 철석같이 믿고 지내왔는데, 장례식장에선 호적에 오른 외할아버지 자식들이 힐끔거리며 은근한 눈총을 주는 나는 그저 30대 문상객이었다. 엄마와 큰삼촌은 “아부지”라고 부르며 모셨던 외할아버지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엄마 이름은 외할아버지 쪽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냐고 묻고 싶지만 할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가 아니고, 내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가 아니며, 내 친구가 좋은 친구가 아니고 내 애인이 좋은 애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나는 '행복한 우리집'의 모습을 꿈꿔왔다. 이제는 행복한 우리집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고 '적당한 우리집'으로 수정 중이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픈 기억이 내 삶 곳곳에 있다. 외할아버지에겐 왜 가족을 이모양으로 만들어뒀냐고 질문할 수 없다. 행복한 우리집은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에만 있는 이상향이거나 과한 목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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