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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l 19. 2018

에휴 집안일, 같이 좀 합시다

남편에게 제안하는 합리적인 가사노동 분담리스트를 작성했다.

나는 사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하는 일이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삼형제 중 막내인 남편은 부모님의 든든한 지지와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 타인이 도와주고 챙겨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4년 연애하면서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계기는 편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 때문이었다(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도 좋았다).


아들만 오냐오냐 하고 사랑 표현이 서툴렀던 우리 아버지는 무뚝뚝했고, 돈을 번다는 이유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를 무시하는 듯 한 태도가 나는 날이 서도록 싫었다.


남편의 단점 중 몇 가지만 내가 잘 채워주면 가정을 이루어 괜찮게 잘 지낼 줄 알았다. 막상 살아보니 나라는 사람은 집안일과 육아에 대한 기쁨보다 힘듦을 더 잘 느끼고, 누군가와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둘 중 한 명은 감당해야 할 집안일이 쌓여 갔다. 나는 급한 성격 탓에 나무늘보 성격의 남편이 치우길 가만히 기다리질 못한다.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가사 노동을 하다가 결국엔 볼멘소리가 터지고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집안일이 뭐길래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른 것일까.


남편은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를 하셔서 삼형제를 돌봐준 사람이 일하는 아주머니였다고 했다. 집안일 역시 자신이 할 일이 아닌 아주머니가 해주는 일이었던 거다.


결혼해서 가장 의아했던 건 정리되지 않고 버리지도 못한채 켜켜이 쌓인 물건들, 밥 먹고 식탁을 바로 닦지 않는 모습, 1주일에 한 번씩 여전히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는 아주머니의 존재까지.

나는 자취를 하면서 둘째 동생과 분담하며 감당했던 영역이 집안일이었다. 남편은 집안일 때문에 욱하는 나를 볼 때마다 잘 도와달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이 서투른 나는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출산을 앞둔 요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집에 가면 쾌적한 환경에서 쉬고 싶은데 쉬지 못한 채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친정집이 지방이라 도망갈 곳도 마땅치 않다.


하기 싫은 집안일을 즐겁게 하려면 감정을 추스르고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다. 밀린 빨래를 해야 했던 주말,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대학로 한 카페로 향했다. 하염없이 카페 창문 너머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리를 관찰했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젊음을 한껏 뽐내는 미혼 여성의 삶이 내 모습과 비교가 되니 질투가 났다. 오늘 맛집은 어딜 가고 카페는 거길 가고 싶다며 까르르 거리는 이야깃소리 마저 부럽다. 나는 임신 막달이라 당도가 높은 음식은 가려먹어야 하고, 내가 먹는 게 아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니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애인이 있는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 허리를 감싸는 손길마저 풋풋하게 느껴진다. 주수마다 달라지는 몸과 몸무게의 변화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다. 마지막 달이라 무서울 정도로 불어나는 체중에 점점 인간 뚠뚠이가 되어가고 있다.       


창문 너머로 자녀만 데리고 남편 없이 홀로 나온 엄마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벌써부터 괴롭다.  먼 미래가 아니라 나에게도 가까운 일이니 막막한 느낌이 앞선다. 아기를 갖고 싶은 이에겐 내가 내뱉는 투정과 부담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금방이라도 육아전쟁이 시작될 것만 같아 기쁘지만은 않다.                


주말엔 2살 된 아기 엄마인 남편 친구 부인과 같이 밥을 먹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분명 진수성찬이었는데 아기를 먼저 먹이고 자기가 먹는 게 편하다며, 후루룩 거리며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식사하는 그녀 모습을 보니 체할 것 같았다. 출산 전 시간만이라도 아기 엄마와 식사는 멀리하고 싶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김혜진, 딸에 대하여 중)       


남편은 카페에서 주중에 영혼을 불태우고 하루 쉬는 일요일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 나는 보통 주말에 쌓인 빨래를 하는 편인데, 옷가지에 이불빨래까지 더해지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베란다가 없어서 이불과 옷가지를 동시에 널기 어렵다.


한꺼번에 빨래를 할 수 없는 불편함을 남편에게 토로했지만 ‘두 번 빨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니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렇게 쉬우면 지가 하지 맨날 던져놓기만 하니’라는 불만이 올라온다.


하루 쉬는 시간이 남편에게는 무척 소중하겠지만 고양이방인지 돼지우리인지 모를 공간에서 컴퓨터 게임할 시간에 밀린 집안일을 하면 좋겠다.   

          

부부가 서로 합리적으로 가사노동을 분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에게 제안하는 우리집 맞춤 합리적인 ‘가사노동 분담리스트’를 작성했다.


1. 고양이와 함께 지내면서 털로 뒤엉킨 이부자리는 매일 창문을 열어 털고 잘 개어놓으려 노력한다. 아니면 고양이 털을 밀거나 고양이와 따로 자도록 한다. 고양이방 청소는 쉬는 날 꼭 한다.

2. 화장실에서 치약은 사용하고 지정된 자리에 놓는다.  머리나 샤워 후 젖은 수건은 빨래 바구니에 넣고 새 수건을 꺼내 놓는다.

3. 밥을 먹고 식탁을 꼭 닦는다. 설거지는 미루지 말고 바로 한다. 재활용 쓰레기 역시 정해진 장소에 버린다. 분리수거를 꺼내 놓는 건 내가, 남편은 정해진 요일에 잘 가져다 버린다.
4. 매일 청소기를 돌리는 건 내가 담당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 걸레질은 남편이 담당한다. 혹여 밀린 빨래가 보이면 본 사람이 세탁기를 돌린다.

5. 밥통의 밥은 떨어지지 않게 마지막으로 다 먹은 사람이 해놓는다.

6. 1번부터 5번이 벅차게 생각되면 일하는 아주머니를 고용해 집안일의 도움을 받는다.

결혼과 동시에 감당하고 누리는 것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 누리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경험에는 장단점이 있다는데 자꾸 장점만 취하고 싶은 욕심이 올라온다.


뭐든지 혼자서 해결하고 고민하며 첫째로 살았던 삶이 여러 역할과 부딪히며 세밀하게 말하고 부대끼며 성장통을 겪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어떤 일도 당연한 건 없다. 부부간의 가사노동만 잘 분담해도 서로를 향한 스트레스가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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