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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l 26. 2018

첫째의 무게

가족 앞에선 독립심이 강한 척했지만 남의 눈치 많이 보는 겁쟁이

은유와 함께 감응의 글쓰기 8차시 - 남자는 불편해를 읽고 쓴 짧은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캄사합니다

엄마는 늘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문제를 꼭 나에게 토로하고, 문제가 있을 때만 연락을 해서 마음을 심란하게 뒤집어 놓는다. 


문제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정해소가 되는 측면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내 진심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했으면 좋겠단 마음이 앞섰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엄마의 태도가 싫었고,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 버겁다고 느꼈다. 외면하고 싶었다.


얼마 전, 여수에 사는 엄마와 셋째 동생이 서울에 사는 둘째와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나에게 이틀 연속 전화를 해댔다.


처음 셋째 동생이 둘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나에게 연락했을 땐 유독 내가 예뻐하는 동생이라서 “걔, 원래 그래”라고 잘 넘어갔다. 다음 날, 엄마가 둘째가 연락이 안 된다고 또 연락해오자 마구 짜증을 냈다. 나한테 전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며 핏대를 올렸다.      


나보다 혼자 있는 둘째를 걱정하는 엄마한테 내심 서운한 게 쌓였던 걸까. 엄마한테 짜증을 낸 걸 후회하며 둘째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통화가 되지 않았고 “엄마가 걱정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씹혔다. 나는 가족 관련된 일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시달린다. 장녀인 나는 가정에서 어디까지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특징의 일부는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가 젠더로 여기는 것들 대부분은 학습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남자는 불편해 중)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첫째 딸이 감당할 역할을 잔소리에 보태서 자주 쏟아냈다.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지만 늘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 없는 나열이다.


“큰 년이 되어가지고 동생들한테 본을 못 보인다. 인정머리가 없다. 언제 철들래. 큰 년이 그러니까 집안꼴이 이모양이지...


엄마가 한 말에 합당한 행동이 나에게 나오지 않으면 그녀의 분노는 배가 됐고, 나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지’라며 스스로 자책하는 방식으로 부모님 밑에서 19년을 살았다.


남자만 대우받는 집안 분위기에 나는 딸로 태어났음에도 남자처럼 살고 싶었다. 가족 안에서 아들이 아닌 딸이지만 첫째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어떤 방식으로든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에 목말랐다. 남자인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서 8살 때, 그가 피우던 담배를 몰래 호기심에 피우다 호되게 기침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만 용돈과 카드를 주면서 물심양면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나도 용돈 받을 줄 알고 부모님 카드 쓸 줄 아는데 첫째인 나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뽕짝 취향, 소방관이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가질 정도로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면 장래희망부터 소방관을 선택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는 선택을 해가며 내 삶을 꾸려나갔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왔는데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동생들의 ‘큰 언니’에 대한 기대감과 엄마의 ‘첫째 딸년’이라는 기대감을 채우지 못해 힘겨웠다. 가족의 욕망은 애초부터 내가 채우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채워주려고 애쓰다 지쳐 나가떨어졌다.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이기적이고 부족한 존재감을 가진 첫째라는 인식을 바꾸려면 내가 죽어야 가능한 것처럼 느꼈다.


“스스로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야 진짜 남자라는 믿음이 너무 깊이 박혀 있는 나머지 남자들은 그 일에 목숨을 건다.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자살하는 것만도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남자는 불편해 중)    

     

청소년기 때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이혼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내 인생을 누군가 책임져주지 않겠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는 남자가 목숨을 걸고 느끼는 책임감을 무슨 일이든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체화했다.


결혼하고 남편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마주하며 책임감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력을 가진 가족에게 빨대를 꽂고 빌붙어 살면 내 인생이 버러지처럼 의미 없는 삶이 될 것 같았다.


과한 생각의 지배를 받는 몸은 늘 잔뜩 긴장한 상태로 버티며 살았다. 회사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어 엄마에게 고민을 토로하면 돌아오는 건 걸쭉한 욕이었다. 나는 상사의 성추행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염병 지랄하고 있네”라고 엄마의 욕을 들으면 공감받을 문제가 아닌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일로 바뀌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이름 있는 학교에 들어가고, 관두고 싶은 회사라도 버티면서 다녔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가정을 이루자 회사를 내려놓을 용기가 생겼다. 가족 앞에선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인양 살았지만 사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겁쟁이다.


 

엄마 친구 자식들은 용돈이라며 한 턱씩 크게 낼 때 나는 내 생활에 쪼들려 부모님의 현재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세 명의 동생이 있어도 넉넉히 용돈을 챙겨준 일도 열 손가락에 꼽는다.


이번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남편 그림자 뒤에 숨어 지인처럼 이직하면 잘 될 줄만 알고 덤비었는데 현실은 만만치 않다.      


회사 밖을 나오니 내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허울 좋은 포장지를 벗기니, 나는 내 이야기보다 타인의 목소리가 확성기처럼 크게 울리고,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하고 나면 좋든 나쁘든 심하게 영향을 받는 유리멘탈의 소유자였다.


일할 때는 돈 많이 벌고 이름 있는 직장 다니는 이들을 부러워했고, 일하지 않는 지금은 일하는 타인을 부러워하며 자책한다. 돈 버는 일이 아니면 인정하지 못하는 옹졸한 나 자신과 싸움이 거세다.


9년 동안 콘텐츠를 다루며 글을 쓰고 싶었던 꿈을 이루었지만 메이저 신문사에 취직한 기자, 저널리스트를 부러워했다.


언론고시 볼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높은 기대치만 있다. 타인에게 내가 쓴 기사 혹은 인터뷰를 소개하거나 자랑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쓴 텍스트를 뜯어고치는 이를 만날 때면 내 실력이 비루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진 건 부족함 투성이니 거기에 꽂혀서 앞으로만 나아가야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독립적인 척 세상 쿨한 척했지만 혼자 밥 먹는 시간이 싫고, 내 주위에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넘쳤으면 좋겠다. 자존감 높은 사람 옆에 있으면 소심하고 자존감 낮은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됐다. 정체성이 약하고 자존감이 낮으니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실체 없는 허상을 쫓으며 힘들어했다.     


일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무시가 유령처럼 내 목을 조를 것 같았고, 아버지처럼 루이스가 돈 번다는 이유로 나를 구박할 듯싶어 나는 취업사이트에 미치 사람처럼 이력서를 넣었다.


몇 개를 넣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도전했지만 1차 서류전형부터 탈락했다. 80군데 이상 넣었다는 지인 이야기를 듣고 노력했지만 왜 떨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취업준비생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막 달려가는 순간 멈춰서는 일은 무섭고 두렵다. 계속 달리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벗어나고 싶은 여러 역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나는 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싶은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큰 년이 되어가지고 해야 하는 엄마의 목소리,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주변 지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힌다. 왜 나는 선택과 집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인지 머리를 굴리면 답이 나올까. 꼭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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