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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먹는일기

남편이 밥은 차려줘?

젠더감수성, 로푸드팜 비건햄버거, 비트디저트, 설농탕

by 김애니

아침, 점심, 저녁으로 무덥다. 무더우니 입맛도 없다. 임신하고 엄마의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젠더감수성을 고민하는 지금, 나는 엄마가 아닌 남자(남편)의 돌봄이 필요하다. 남성의 돌봄은 가정이 굴러가도록 '돈'만 잘 벌어다주면 될까?


아침 9시, 인터넷업체를 바꿨다. 에어컨을 틀었지만 인터넷설치기사인 남성은 땀을 뻘뻘 흘렸다. 1시간 40분쯤 흘렀을까 나는 루이스에게 "설치가 쉬운 일은 아니구나"라고 보냈다. 뜬금포 답변이 돌아왔다.


땀뻘뻘해 아빠들이 다들 저렇게
밖에서 고생하는 거야


나는 "케바케지"라는 말로 당황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삼형제 막내로 자란 루이스의 머릿속 젠더감수성은 어느 정도인지 의심스러웠다.


'남자는 불편해'를 읽으면서 젠더감수성(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고민했다. 임신을 하니 젠더감수성과 관련해 고민이 깊어진다.


백지 같은 아이에게 남성과 여성의 구분된 역할, 사회화된 또래집단과 경험으로 어그러지게 자리잡을 어떤 부분들이 걱정스럽다.

8차시 소재였던 '젠더'로 짧은 한 편의 칼럼을 쓰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분량과 과제해결을 했다.


이번 책은 남자보단 여자가 불편한 상황이 많아서 텍스트가 정작 말하려는 바를 정확히 읽지 못했다. 학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놓쳤던 내용을 곱씹을 수 있었다.


여성의 색이 분홍으로 점철된 사건하며, 앞으로 요구될 남성상은 부드러움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까지 말이다.


의외로 여성 안의 마초 성향을 가진 학인들의 고백도 이어졌다. 그 말에는 나 역시 동의가 됐다. 나조차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을 강하게 지녔기 때문이다.


수업하는 곳에 남성 3명이 있는데, 한 학인은 아내와 가사를 분담해서 돕고 있었다. 요리 담당이라니 부럽다.


루이스가 아버지깨서 돈 버는 일에 집중하느라 집에서 아무것도 잘 못하셨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맥가이버다(그런 걸 좋아하신다고).


루이스 아버지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시진 않는다. 상을 차릴 땐 도우시고 설거지, 쓰레기도 버리시던데...


아들 루이스는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예상 외로 강하게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성이 꼭 가정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질 않는, 남성과 함께 꾸리길 원하는 사람이다. 비혼 역시...


결혼까지 해놓고 '비혼이라니'라고 말한다면, 안타까울 뿐이다. 결혼한 지 1년인데 현실은 냉혹하다. 아직도 현실이 무지개색이라면 결혼하시라. 대신 남편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찬찬히 잘 둘러보시길.


태어날 아기 성별은 16주부터 결정되었고, 나는 그녀의 취향을 분홍색으로 도배하지 않겠단 결심으로 옷은 회색이나 흰색을 입힐 생각이다. 성별과 관련해 아직 분홍색 옷을 선물한 사람이 없다. 천만다행이다.


수업을 마치고 아직 나에겐 낯선 단어 '뒤풀이'에 참석했다. 학인이 운영하는 로푸드팜에서 비건햄버거와 디저트, 음료를 마셨다.



은유가 말했다.

"애니, 아기 태어나기 전에 가사노동 분담을 잘 해야 돼. 감각의 문제거든. 나처럼 혼자서 다해버리지 말고, 나랑 너무 비슷해서 그래."


젠더감수성은 감각의 문제다. 감각은 몸이 열릴 때만 느끼는 게 아니라 젠더 조차도 눈이 열려야 다른 성별의 입장이 보인다.


남초가 가득하고 이기적인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남성에게 엄마인 여성을 이해하자고 말하는 건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루이스 어머니 조차 여성성이 강하긴 보다 마초적인 남성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고 생각했다. 잔다르크 스타일


비건버거로 건강하게 입을 채우고 집 근처 설렁탕집에서 김치로 마무리했다.


천천히 먹었는데 양복을 입은 손님이 내 바로 뒤 옆자리에서 대놓고 TV를 봐서 불편했다. 막판에 맛있게 먹다가 체하는 줄 알았네.


육아준비는 젠더감수성을 루이스와 함께 기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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