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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먹는일기

병원 검진은 늘 긴장돼

스타벅스 더블샷 바닐라, 크리스피 도넛, 소불고기, 꿀떡, LA갈비

by 김애니

6시간 금식하고 출근길 러시에 버스를 탔다. 사람은 보통이었는데 빈자리는 없었다. 복대를 했으니 임산부에 대한 자리양보나 애초에 배려는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씩씩하게 맨 앞자리 앞바퀴 높은 턱에 두 무릎을 기대었다. 그나마 괜찮았다.


임신하지 않았을 때 나 역시 임산부를 배려하지 않았다. 배려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출근길에는 모두 피곤하다. 몸이 무겁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오전 9시 10분, 출산하는 곳과 연계된 종합병원으로 옮기게 됐다. 막달 검사를 위해 처음 만난 교수님은 인터넷에서 보고 간 대로 약간은 시크하면서 차가운 분위기였다. 첫인상으로 파악하는 건 실수가 많으니 그냥 넘겼다.


병원 가는 날은 떨리고 긴장된다. 병원이 주는 이미지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지처럼 한 뭉텅이로 엮어 있다. 금식을 해서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오늘 분만 전 검사는 냉검사, 엑스레이 검사, 피검사, 소변검사로 160,950원을 지불했다. 임신 바우처로 발급받은 카드에 남은 비용이 이제 17,850원이다. 잘하는 짓인가? 왜 점점 자신이 없어질까. 돈 때문인가. 사람이 돈 앞에서 쉽게 작아진다.


종합병원은 방문할 때마다 백화점 같다. 사람도 많고 돈도 많고 서비스도 좋다.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는 의료진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 한두 명 환자를 보는 일이 아닐 테니 병원 구조를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냉검사는 의자에 앉으면 자동으로 다리가 벌어지고 의자가 뒤로 젖혀진다. "힘 빼세요"라고 교수님이 말했지만 처음 받는 진료실이 낯설어서 긴장한 탓에 힘이 생각대로 빠지진 않았다. 순식간에 끝이 났다.


스피커로 아기 심장소리를 들려줬다.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1분 정도 들으면서 스피커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모가 궁금한 건 스피커로 들려오는 아기의 심장소리가 아니라 잘 있는지 녀석의 안부 정도인데 말이다. 병원 진료 때마다 심장소리를 들어서 벌써 식상해졌나 보다. 익숙함은 모든 일을 시큰둥하게 대하게 만든다.


옷을 갈아입고 다음 주 월요일 비슷한 시간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부지런히 병원에 와야 한다. 교수님과 진료를 마치고, 간호사가 알려주는 대로 이동해서 피검사와 소변검사 그리고 엑스레이 검사까지 끝냈다.


9시쯤 도착한 병원은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엑스레이 찍는 대기실에는 젊은 의료진이 가득했다. 대충만 봐도 20대들이 첫 직장으로 그곳에 와서 개고생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개고생도 감사하면 좋겠다 싶었다. 늙으면 거기에서 일 못할 것 같았다. 힘이 없어서 말이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기진맥진했다. 가까운 스타벅스에 들려 더블샷 바닐라를 톨 사이즈 컵에 달라고 해서 먹었다. 간만에 더블샷을 시켰더니 메뉴를 말하면서 버벅거렸다. 더블샷 바닐라는 원액으로만 마시면 화장실을 바로 가길래, 요령이 생겼다. 톨 사이즈 얼음컵에 넣어서 밍밍한 카페라떼를 마시느니 변조한 더블샷 라떼를 마시는 편이 낫다.


더블샷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혀와 목구멍을 넘어갔다. 살 것 같다. 후유. 어제 롯데아울렛에서 산 크리스피도넛을 재빨리 꺼내 같이 먹었다. 요즘 잘 안 보이는 크리스피 도넛이 그렇게 당긴다.


창문을 바라보며 시원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이상한 정상 가족>을 읽었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커피를 홀짝 거리며 책 1권을 읽었다. 행복했다.


자녀를 부모 소유로 생각할 때 어떤 끔찍한 아동학대가 일어나는지 읽으면서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기독교에서는 자녀 체벌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상한 정상 가족>을 읽으면서 체벌 자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매를 들고 무섭고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이상한 정상가족 30페이지 중)


어떻게 과학적 근거가 없는 체벌을 가할 수 있을까? 알게 된 이상 행동하는 건 깨름칙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읽어서 다행이었다. 부모와 자녀의 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아이들의 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해지면 집착하거나 방임하게 된다고 말한다. 육아전쟁을 앞두고 내가 명심할 부분은 각자의 인생이 따로 있다는 인식이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됐다.


도넛과 커피를 먹었지만 허기가 졌다. 대학병원 근처에는 밥집이 차고 넘쳤다. 사 먹는 편이 쉽지만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외식하면서 혼자 밥 먹기 싫었다. 점심에는 혼자 먹으면 체할 것 같다. 뭐든지 같이 먹어야 맛있다. 혼자 먹을 거면 편안한 집이 낫다.


집에서 엄마가 보내준 반찬에다 맛있게 잘 먹었다. 오후 4시에는 운동하는 스케줄이 있었다. 커피로만에 들려서 900원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더위를 달랬다. 전에는 어떤 커피만 맛있다며 취향을 고집했다. 요즘에는 모든 커피가 다 맛있다. 대부분 먹을 만하다.


오후 6시, 날씨가 푹푹 찐다. 조금만 걸어도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하다. 꿀떡이 먹고 싶어 대학로 떡집에서 구매했다. 걸으면서 당과 탄수화물을 섭취했다. 다행히 퇴근 시간과 이동시간이 겹치지 않아서 집으로 무사귀환. 글쓰기 과제 끝을 못 내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마르가 옆에 같이 있어줘서 덜 심심한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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