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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Sep 15. 2018

내 삶으로 글쓰기

오롯이 나다울 수 있는 시간, 글쓰는 순간

은유의 첫 책이었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문장마다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전업주부였을 때 안쓸 수 없는 상황이어서 투쟁하듯 써내려갔던 당시 그 느낌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져서 그랬을까? 육아가 시작되니 나에게도 글쓰기는 투쟁하고 쟁취할 것이 되어버렸다.


애 낳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나부터도 출산 이후, 즉 육아 집중기에는 신문을 챙겨볼 시간도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 기운도 없었다.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시간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by 은유 


출산하고 신생아인 아기는 매일이 다르다고 한다. 나는 매일 옆에서 돌보다 보니 녀석의 살이 차오르는 걸 손목의 시큰거림으로 감지하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달라짐을 확인하는 꼴이다.


종종 찍힌 아기 사진을 보면서 이제 51.6센티미터인 아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흠칫하고 놀란다. 작은 존재에게 내가 발하는 사자후가 하루 걸러 이틀을 넘어가질 못한다. 28일 산후조리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성치 않아 신생아의 예쁜 모습을 누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은유 글에서 발췌했듯이 생명체가 앞가림을 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편히 자거나 쉴 권리, 먹을 권리 등을 반납해야 했다.


핫한 카페에서 친구나 지인과 두세 시간 이야기 나눌 권리도 잠시 내려놓거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다.


일상의 결도 달라졌지만 돈 내고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라 어딜 가려면 시간을 내야 하는데, 신생아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최근에도 고민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은유의 글쓰기가 하반기에 두 개나 열린다. 시작하기 전에 벌써 마감됐다. 하나는 평일 오후 2시와 평일 오후 7시 반 타임이다. 100일도 채 안된 신생아를 낳은 나는 은유의 글쓰기를 들으려면 루이스와 육아를 당연히 분담해야 했다.


오후 2시 타임 수업에 아기를 안고 갈까도 생각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다. 나에게 돈을 주지도 않고 오히려 돈과 시간을 내어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이다. 아기를 수업에 데리고 간다면 2,3시간마다 깨서 먹이고 갈아주고 재워야 하니 민폐가 따로 없을 듯싶다.


결국 저녁 타임 강의를 신청했다. 신청하기 전까지 욕구불만에 시달렸다. 단순하지만 신청하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대신 글쓰기를 가야 하는 날에는 아기가 먹을 충분한 모유 유축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미리 감응의 글쓰기 13기에서 은유가 추천한 책의 목록 중 '충분하다'라는 시집을 읽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쓰는 즐거움에 관한 짧은 시구가 감응이 됐다.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by 쓰는 즐거움,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글을 쓴다고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은유가 지나가듯 했던 말인데 책을 내고 작가가 된다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어쩌면 글을 쓰고 기록하는 일도 그럴지 모른다. 타인은 내 삶에 그리 관심이 없다는 걸 여실히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욕망은 쓸 때 누리는 즐거움과 지속의 가능성 때문인 게 맞다.


전에는 시집을 글을 잘 쓰기 위한 어떤 도구로 봤는데, 육아가 시작되니 시집만 한 게 없다. 책 한 권 읽으려면 아기와 분리가 되어야 하는데 영 어렵다. 루이스나 시어머니가 오셔서 도와줘야 잠깐 여유를 가져야 가능한 삶의 변화다.


쓰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건 나 자신을 엄마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고, 아이의 대체재로 올인해서 살고 싶진 않다는 의지적 발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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