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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Oct 12. 2018

글을 씁니다

퇴사하고 읽는 책 - 결혼, 육아의 사회학

글쓰기를 경쟁하니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기 바쁘다. 띄어쓰기, 비문찾기가 자신의 실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사소한 실수를 발견하는 데 사용된다.

 "문장은 짧아야 좋다", "첫 줄에 메시지를 드러내라" 등의 비법이 난무하니 별다른 논거 없이 그 반대 스타일의 문체를 비하한다. (중략) 제대로 독서를 했다면 남이 어떻게 읽고 쓰는지는 관심사가 될 수 없는데 말이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기사 중 판교, 아이티 업계 직장인들을 울린 장류진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의 동명 에세이에서 제목을 따온, 올해 창비신인문학상을 받은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단숨에 읽었다. 


그녀의 글은 매력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났던 귀여니 작가의 소설이 생각나면서, 요즘 세대들의 구미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소설에는 익숙한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대표가 나오고, 스타트업계 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등장하고, 당근마켓이 연상되는 우동마켓이 나오고,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일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을 복사하고 붙여넣기 하듯 생생하게 적혀 있다.


회사 대표에게 미움을 받아 월급을 현금이 아닌 포인트로 지급받는 거북이알 캐릭터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사람들이 책을 덜 읽는다고 하지만 이 한 편의 단편소설에 열광하며 공유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어쩌면 작가들이 읽을만 하지 않게 써서 사람들이 읽지 않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장 작가의 인터뷰에서 한겨레문화센터가 나오고, 1년 쉬면서 썼던 소설이 다시 취업해서 나간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당선 연락을 받고, 계속 글을 쓰겠다는 기쁨이 잘 정제된 당선소감을 읽었다.


글은 위트 넘치고 동시대의 문체로 말하는 사람이 잘 쓰는 것만 같다.


글을 쓰는 원동력을 가진 타인이 부럽다.


마치 이건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평범한 직장인에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민조킹이 들었던 클래스를 나도 들으면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싶어 했던 나의 삽질이 떠올랐다.


소설을 쓰려면 엉덩이를 붙이고 몇 글자라도 꾸준히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 잔머리는 한겨레문화센터를 키보드로 누르고 담당 해이수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가 살펴보고 돈을 지불하고 이번엔 소설이야 하면서 저 멀리 달려가는 자유로운 마음을 부여잡는다.


당선 된 사람은 계속 글을 쓸 원동력이 있겠구나 싶다. 비교에서 오는 어그러짐의 단면이다.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원동력이니

당선이니

데뷔이니

이런 말도 안 된 말을

길게 늘어놓는다.


내 안에도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는 걸까. 아리까리하다. 제삼자는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나는 갈팡질팡한다. 무언가에 올인하기엔 망설여진다. 멈칫둠칫


글쓰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스스로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육아를 시작하고 주입하듯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모성이 싫었던 찰나에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전 회사 차장님이 뭐 받고 싶은 거 없냐고 해서 엄마 된 기념으로 선물을 받았다.


<결혼, 육아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꽂힌 부분이 글에 관한 문단이었다. 책 내용은 독서를 다루는 부분이었는데 나는 글을 이야기한 저자의 언급을 읽으며 나는 표독스러운 실장이 생각났다. 지금도 실장이 생각난 사실이 미치도록 싫다. 악몽같은 기억은 왜 이렇게 휘발되지 않을까.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똥밟은 기분을 선사하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한 명이 그 실장이다. 아직도 미운 감정이 올라오는 건 종교로도 해결이 안 된다. 어쩌면 아직 내가 인간이 덜 됐거나 혹은 젊어서 혈기왕성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실장은 사수라는 이름으로 내 글을 늘 깔아뭉갰다. 내가 쓰는 글은 실장이 하도 뜯어고쳐서 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글을 늘 갖고 싶었다. 아니다. 내 글이 좋았다. 내 글을 고치는 건 나 자신을 뜯어내는 힘겨운 작업이었다.


첫 직장에서 8년 4개월 정도 다녔는데, 처음에 내 글을 분량이 넘친다고 이리저리 고치려는 디자이너와 많이 다퉜다. 회고하기론 디자이너가 난 내 글을 만지는 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싫어하는 걸 그곳에선 내 의가 마치 센 사람처럼 취급받았던 것 같다.


사회의 물을 먹고 대충 일해서 돈이 나오니 점점 내 글이 어딨어?라는 생각으로 내려놓고, 돈을 버는 글을 써댔다.


돈을 벌면서 나의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분명히 그렇다.


실장의 화려한 경력에 기죽어 내 문체는 문제가 있으니 실장의 조언 하나도 허투로 듣지 않으려고 필기했던 기억이 난다.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원고를 늘 찢어갈기는 실장을 이제서야 죽이고 싶다. 늘 빡침은 뒤늦게 온다.


주술구조가 엉망이라고 하도 십자가 처형을 당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란 인간은 주술구조도 아직까지 헷깔리는, 글 쓸 자격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도 쪼아댄 실장 덕에 믿을만한 실장의 컨펌이 없으면 자기검열에 걸려서 쓰던 글도 지우고 표현의 벽을 만들어댔다.


갖은 지적질을 당하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됐을 것이라 생각하려해도 잘 안 된다. 싸우고 싶지 않고, 걔한테 화려한 경력인데 괜히 기죽어서 멍청한 세월을 보내며 단단해졌다.


어쩌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글인데 그것조차 허용하거나 용납하지 못했다. 나는 글로 먹고 살아야 하고,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서로 부딪히면서 잘 쓰고 싶은 과한 마음에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았단 생각이 든다.


글을 써댔던 꽤 긴 시간

나는 돈을 벌었다.


글 쓰는 게 좋으니까 이걸로 돈을 벌고 싶진 않다. 좋아하는 글쓰기 만큼은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고 싶다. 희망사항일 뿐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 건지도...


컨텐츠 제작은 글쓰기가 아닌 기획의 영역이니까 돈은 그걸로 벌고, 글쓰기는 ‘나’라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창구로 살아 숨쉬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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