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애니 Apr 10. 2019

글쓰며 살고 싶다고, 왜 말을 못해

퇴사하고 글을 씁니다 - #1일1글쓰기

말하는 주체로서 말하고 글을 쓸 것이다(쥘리아 크리스테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중)

“삶에서 지금 고민하는 것들이 해결된다면 뭘 하고 싶어?”

메타포라 마지막 수업이었던 엠티에서 인사이트가 컸던 질문이다. 엠티에 참석한 열네 명의 사람들은 욕망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했다. 나는 생각할 게 많다는 말로 패스하듯 유보했다(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다). 타인의 욕망을 들으면서 내 안의 욕망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 행복한 가정을 향한 마음, 글쓰는 삶, 이것저것도 하고 싶은 꿈, 재미있게 살고 싶은 것까지.      


쓰면서 다시 내게 묻는다. 삶이 안정된다면 나는 평생 글을 쓰고 싶다고 답하겠다. 친구가 등단을 목표로 글을 쓰고 있다. 나도 등단을 목표로 글을 써봐야 하나 고민이 돼서 장강명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을 읽었다. 공모전이 작가 데뷔 루트로 활성화된 나라 중 한국은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등단이 목표라면 글의 여러 장르 중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정해야 한다. 나는 르포 형식을 다른 장르에 비해 잘 쓸 수 있겠다 싶었다(전기와 실화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공모전을 목표로 글을 쓰는 건 내 길이 아니란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경쟁이 되는 구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삶이 긴장이고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로 사는 사람인데, 경쟁하는 구도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경쟁하고 싶지 않고, 실력도 되지 않으니 공모전으로 작가 타이틀을 거머쥔다는 건, 꼭 내가 아니어도 될 일이지 싶다. 그래도 글은 쓰면서 돈을 벌고 싶어 콘텐츠 에디터로 구직사이트에 검색했다. 관심 있는 일은 이력서를 보냈다.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남의 사업 잘 되라고, 글로 포장해주면서 돈을 벌겠지만 스트레스받을 생각하면 또다시 그런 류의 일이 망설여진다. 원, 이렇게 생각이 많아서야 답답하기 그지없다.       


회사를 나올 때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퇴사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큰 비중을 차지한 만큼 나에게도 작가DNA가 있는 걸까. 퇴사한 지 1년이 되니까 내가 이루고 싶었던 모습에 부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본다. 지금 내 상황은 글이 쓰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어정쩡한 상태다. 그런 고민을 남편에게 털어놨다가 취미로 글을 쓰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이 서운했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고 싶다. 글을 쓸 때, 나는 써지지 않아서 괴롭지만 완성 후 찾아오는 성취감이 좋다.


돈을 벌 때보다 요즘 쓰는 글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돈을 벌진 못한다. 평생 글을 쓰려면 돈을 벌어야 나는 쓸 원동력이 생기는 걸까. 돈은 남편 가게가 바쁠 때 일손을 돕고 목표 금액을 넣으면 일당으로 받는다. 월급쟁이로 살다가 일당을 받으니 매일 은행 가서 현금을 입금하는 즐거움이 있다. 남편에게는 암묵적으로 일을 구하기 전까지라는 이야길 해두긴 했지만 일이 구해진다고 몸만 쏙 빠질 상황이 아니다. 어제는 아메리카노 8잔, 연유라떼 1잔 총 9잔의 음료를 팔고 만 9천 원을 벌었다. 단체 손님이 바쁜 시간에 줄줄이 와야 일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보람도 느낀다. 머릿속 한 켠에는 가족이랑 같이 일하는 건 무조건 안 된다는 생각도 있다. 가족과 일하는 건 어렵다. 일당을 받지 않고 가족무급노동자로 일했을 땐 사사건건 부딪혔다. 남편의 일을 돕는 게 아니라 내 일이라며 마음을 바꿨다.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는 마음을 먹으니 부딪힘이 덜해졌다. 나는 군소리하지 않고 일한다. 남편이 일하면서 싫은 소리를 해도 일당을 받으니까 입을 다문다.  


나는 딱히 삶의 목표를 갖지 않고 살아왔다. 종교를 가진 이후론 목표 없이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 때는 목표가 없어도 시간이 잘도 흘러갔다.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직장에서 이탈하고 출산과 육아도 목표가 있으면 안 되는 삶의 영역이더라.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는 무언가 자유롭게 할 시간이 생겼지만 삶의 목표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신문기자를 꿈꿨을 때 언론고시가 싫어서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다. 언론고시를 보지 않아도 사람들은 내가 맡은 일 때문에 기자라고 불러줬다. 타인은 나를 그렇게 대해줬지만 당시 나는 뼛속까지 회사원이었다. 브런치 플랫폼에서는 '작가'라고 불러준다. 등단하지 않아도 되는 길인데, 자신이 없어서 옆길로 가려는 용기없음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두려움은 실체 없는 허상이라지만 호기롭게 목표를 잡았는데 잘되지 않을까봐 두렵다. 잃을 게 없으면 무서울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자영업자의 아내, 누구 엄마 말곤 이름 앞에 단 게 없는데 뭐가 이렇게 무서울까. 글을 잘 쓴다는 자의식이 있는 걸까. 있다면 허세 가득한 쓸데없는, 글 잘 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다. 목표를 잡고 도전했는데 잘 되지 않았을 때 결과를 받아들이고 감정을 추스르고 이 길이 아닌가보다 하면서 다른 길을 두드려야 하는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쉽게 넘어갈 산이 못된다. 퇴사하고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겠다며 담담하게 고백했다. 서류광탈은 기록되지 못했다. 광탈하면 집나간 정신과 마음을 추스르느라 글쓰기와 멀어진다. 나는 실패한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몸과 시간을 쓰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나는 독립적인 성향처럼 보이나 마음은 연약하기 이를 때 없어서 잘 되지 않는 상황에 유연한 사고를 못한다. FM처럼 살아온 삶이 이럴 때 꼭 탈이 난다.      


글을 쓰고 싶다는 내 욕망은 온전히 나의 것일까. 글쓰기 수업에서 은유가 충실한 독자가 되어 달아주는 코멘트에 중독된 건 아닐까. 쓰기가 온전히 내 욕망이라면 나는 어떤 장치없이도 즐겁고 기쁘게 매일 쓰기도 모자란 삶은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쓰지 않아도 삶은 살아진다. 단지 쓰면서 지난 삶은 텍스트라도 흔적이 남는다. 그렇지 않은 삶은 기억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요즘은 몇 시간만 지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 나는 장치가 없으면 의지가 박약한 인간이라 뭐든지 지지부진해진다.      


나는 감정이 널뛸 때 아무말대잔치를 잘한다. 그런 순간처럼 엠티 때 말이라도 해볼걸 아쉬움이 남는다. 말한 대로 살아내지 못할까 봐 나는 미리 겁을 먹었다. 막연한 내 욕망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좁게 글을 썼을 때 필자의 경험이 반짝이는 것처럼, 내 안의 욕망도 작고 명확해서 가는 길목이라도 밝게 비춰줬으면 좋겠다. 나는 할머니가 돼서도 글을 쓰는 삶을 살 것이다. 작가, 등단하지 않아도 쓰는 사람이 작가 아닌가.


사진 =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편하게 싸돌아다닐 여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