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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May 07. 2019

모히또바와 용준씨

나는 가족도 아닌데 회사 동료의 죽음을 떠올리면 아직도 슬프다.

   

2015년 11월, 용준씨는 기침이 멈추지 않아 애를 먹었다. 38살이었던 용준씨는 기침 때문에 생애 첫 종합검진을 받았다. 병원에서 폐 CT를 찍었다. 회사생활 10년 이상했던 용준씨는 초겨울에 회사를 떠나 다음 해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첫 종합검진 결과는 담도암 4기였다. 암이 폐와 뼈에 전이가 돼서 기침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다.


용준씨가 암을 잘 극복하고 돌아오길 기대하며 매일 아침마다 회사 직원들은 중보기도를 했다. 용준씨는 아내와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나는 용준씨의 소식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8년 동안 평일마다 봤던 그의 병이 암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용준씨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았다며, 마흔이 되면 꼭 퇴사하겠다고 했다. 꿈을 찾아 행복한 삶이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동료의 암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용준씨는 회사에서 기독교음악과 쇼핑몰 MD를 담당했다. 그가 자리를 비우니 매달마다 좋은 앨범이 나오면 회사 노동요로 곧잘 듣곤 했는데 전담 큐레이터가 사라졌다.


용준씨가 종합검진으로 암을 발견한 당시, 나는 담관이 지나는 길목에 5센티미터의 종양을 발견했다. 나도 종합검진을 받지 않았다면, 용준씨처럼 갑작스럽게 어떤 준비없이 세상과 이별을 했을 수도 있었다. 종합검진 받을 때 무슨 병이라도 발견될까 겁이 나지만 꼭 필요한 생의 과정이다.


나는 가족도 아닌데 회사 동료 용준씨의 죽음을 떠올리면 아직도 슬프다. 회사 동료였지만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 보낸 시간의 축적과 정 때문일까. 용준씨와 나는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갑자기 말기암으로 죽는다는 진실이 슬픔을 극대화했다. 우리 팀은 용준씨가 국민임대주택에 당첨돼서 들어가는 날 함께 기뻐했고, 둘째가 태어나기 전 유산의 위험 때문에 어려웠던 10달의 과정을 매주 들었다. 나와 용준씨는 톰과 제리처럼 농담 반 진담 반을 종종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는 걸을 때마다 뒷짐을 지고 양반처럼 느리게 걷는 편이어서, 같이 걸을 때면 빨리 걸으라고 재촉해야 했다. 그는 4년 동안 연애만 하는 나를 보곤 헤어지라고 충고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용준씨는 암을 발견한 후 SNS에 매일 투병일기를 썼다. 나는 용준씨가 글을 잘쓰는 사람인지 그때 알았다. 보성에 있는 복내마을치유센터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용준씨가 그곳에서 지내는 시기에, 나는 대학병원에서 총담관낭종 수술을 했다. 요양할 겸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투병하는 용준씨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만나지 않으면 못 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는 1주일 동안 그곳에서 지내면서 용준씨와 틈틈이 교제했다. 그는 암투병 때문에 수척해졌을 뿐, 말기암환자에게 느껴질법한 어두운 그림자는 없었다. 그는 복내마을 연못에 사는 올챙이를 보면서 신의 섭리를 느낀다고 말했다. 자기도 걔네들처럼 살아야겠다고, 자신을 돌아본다고 했다. 그곳에서 5일째 되던 날, 용준씨가 보이지 않았다. 복수가 계속 차서 전남대학병원에 갔다는 이야길 들었다. 나는 머물기로 했던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인사를 나눈 일이 내가 그를 만난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용준씨는 결혼할 때 꼭 초대하라며, 가망이 없으면 빨리 헤어지라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한 달 동안 병가를 내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내가 떼어낸 낭종은 다행히 양성이었고 아프고 나니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자연을 가까이해야 삶의 여유가 생긴다는 걸 알았다. 복내마을과 고향에서 논밭길을 한 달 동안 걷다 보니 서울에서도 걷고 싶었다. 회사 앞 양재시민의숲을 출근 전 걸으면서 이전처럼 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내 건강은 괜찮아지고 있는데, 매일 페이스북으로 접하는 용준씨의 투병생활은 좋아지지 않았다. 암환자가 복수에 문제가 생기면 가망이 없다고 말하는데, 용준씨가 딱 그런 상태였다.


용준씨를 떠나 보낼 마지막 시간을, 지인들만 초대해서 용준씨의 상태를 알리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군포지샘병원에서 갖기로 했다. 용준씨를 아끼는 지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용준씨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 회사 직장동료인 우리(예디, 영은, 도, 나), 아내인 명선 간사님 사람들, 용준씨가 일로 만났던 관계자들, 사역단체사람들 등 꽤 많이 모였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하면, 슬프지 않고 파티처럼 즐거운 분위기였다. 기독교인이었던 우리는 이땅에서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 천국에 먼저 가는 것이라고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용준씨는 몸상태가 좋지 않아서 참석하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용준씨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를 위해 신에게 기도했고 눈물이 주책맞게 자꾸 흘러내렸다. 용준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영상을 봤던 기억이 난다. 회사 야유회로 함께 갔던 설악산에서 찍었던 우리팀 사진이 나왔다. 우리가 회사에서 팀으로 일하면서 같이 있었던 사진들이 몇 초 사이에 지나갔다. 영상을 보는 동안 눈물이 나왔다. 정말 이제는 용준씨와 이별할 준비를 그곳에 모인 각자 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용준씨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원 건너편 노후된 맨홀에 빠졌다. 용준씨가 있는 병원을 나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병원 응급실을 갔다. 용준씨를 만나러 갔던 병원 앞 맨홀에 빠져 무릎을 꿰매러 들어가다니, 어이가 없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용준씨라는 사람을 기억할 각인이 내 오른쪽 무릎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앞으로 살면서도 잊어버리기 어려운 순간 중 하나가 되었다. 용준씨가 암과 싸우는 동안 나는 더운 날씨에 무릎이 아물 때를 기다려야 했다.


용준씨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긴 후, 2016년 8월 20일에 떠났다. 한 사람이 떠난 빈자리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걸까. 나는 결혼 승낙을 받을 때, 그와 헤어지라고 했던 용준씨 생각이 났다. 결혼하니까 초대해서, 생색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 편의점에서 모히토바를 보면 용준씨 생각이 덜컥 난다. 외근 나갔다가 들어오는 나에게 용준씨는 ‘모히또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한다고, 나는 다음에 사주겠다고 인색하게 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용준씨에게 모히또바를 사줄 수 없다. 내가 용준씨와 개인적으로 나눈 카카오톡 마지막 기록은 모히또바를 사달라고 했지만 다음에 사주겠다고 미루었던 내 대답이 적혀 있다. 건강했던 용준씨였기에 이렇게 암으로 떠날 줄 몰랐다. 그럴 줄 몰라서 나는 모히또바 하나 사주는 일에 인색했던 건데,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이 됐다. 나는 용준씨에게 그것을 사주지 못한 게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문득 용준씨 생각이 나면 세상이 정지하는 순간처럼 눈물이 울컥할 때가 자주 찾아왔다. 용준씨는 나에게 팀으로 함께 했던 동료였고, 투병중일 때 마지막으로 보성에서 만났던 기억, 투병일기를 구독하며 같이 아팠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내가 그를 애도했던 방법은 SNS에 용준씨의 상태를 공유하는 단체톡이 있는데 그 공간을 빠져나오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종종 용준씨의 가족이 남기는 피드를 보고 좋아요를 누르곤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용준씨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음악을 더 즐겨듣지 않는다. 좋은 음악이 있으면 같이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던 교제의 기쁨을 나눌 이가 없기 때문이다. 모히또바 아이스크림을 보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먹으면서 용준씨 생각이 나서 울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진 않다. 회사에 있는 동안 오랜 다닌 동료들과는 깊이 관계를 맺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 사적인 이야기도 곧잘 했던 내가 일이야기만 했다. 속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가족보다 오래 직장에서 함께 했던 용준씨를 잃은 슬픔을 다루며 보냈다.  


용준씨의 시간은 멈춰졌고, 내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간다. 용준씨와 같이 다녔던 회사를 나도 퇴사하고 결혼, 출산까지 한 나를 보고 있을 그는 뭐라고 말할까. 생각보다 너무 일찍 떠난 용준씨. 그는 떠났고 나는 여전히 몸의 낭종을 껴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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