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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an 08. 2021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다가오는말들>

폭설이 내렸다. 마음이 막막했다. 녀석은 폭설과 함께 감기로 고생 중이다. 하루는 심하게 아파서, 또 하루는 가기 싫다고 해서 가정보육을 했다. 우리말로 핑크퐁을 듣다가 지겨워서 영어로 들었다. 자동차, 공룡, 동물, 과일동요를 순서대로 들어도 금방 끝났다. 하도 지겨워서 나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샘옥이랑 조성진 노래를 틀고 말았다. 스트레스 받을 때 하는 행동 중 하나가 음악듣기인데, 녀석에게 양보를 많이 하는 일상이 익숙하다. 


지난 12월부터 창고살롱 커뮤니티를 시작했다. 온라인으로만 만나는 여성의 일을 이야기하는 자리다. 잘 해보겠다고 시작한 모임은 이상하게 자꾸 삐그덕거렸다.


1주일에 한번 오후 10시에 시작하는데, 녀석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겹쳤다. 제 시간에 안들어가면 줌으로 참여하는데 애를 먹는다. 2번 정도 그러고나니, 못들어가면 안들어갔다. 돈내고 하는 모임인데 이렇게 안일하게 할 수 있구나 싶어 스스로에게 놀랐다. 들어가기 싫은 마음과 늘 싸워야 한다. 마치 운동등록해놓고 가기 싫은 마음과 비슷하다.


1월에는 아이 둘 엄마인 이의 모임이 잡혀있었다. 나는 모르는 세계인 아이둘에다 워킹맘. 겨우 일이 끝나고 모임 날 녀석은 자지 않았다. 그래서 안고 같이 들었다. 결국 녀석은 듣다가 잠들었다.


온라인모임이라 남편이 내가 뭘하는지 의외로 귀기울이곤 있다는 사실. 몰래 엿듣고 지나가는 말로 볼멘소리를 했다. 나도 발끈해서 맥락도 모르고 이야기한다고 받아쳤다.

워라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과 가정생활은 양립이 가능한가. 모임을 이끈 발표자였던 그의 이야기는 워라밸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삶의 굴곡을 모색한 내용이었다.


나도 고민하는 워라밸. 온라인커뮤니티지만 참여자들에게 한마디씩 발언할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질문한 건, 일과 삶의 분리가 잘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다.


조직생활하면서 대가로 월급을 받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내가 조직생활의 이상향을 쫓고있나 싶었다. 월급과 맞바꾼 시간과 생활의 헌신. 당연한 건 늘 머리로만 알고 가슴까지 오지 않는다. 


언젠간 그런 조직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듯싶다. 조직은 월급을 보상하고 한 사람의 삶을 갈아넣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그래야 회사가 돌아가니까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 해야 하는 건가.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을 아무곳이나 펼쳤다. 어쩌면 상황에 딱 맞는 내용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 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가부장제는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
그 하자와 결함을 체화한 젠더 역할 수행을 윤활유 삼아 굴러간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온라인모임에서조차 말하는 것만 안 시켰으면 싶은 귀찮은 마음을 올해는 극복해야겠다. 적극적으로 말하고 치사해도 끝까지 싸워야 서로 안다. 녀석이 사는 다음 세상에는 남자도 돈 버느라 힘들다, 남자도 설거지 한다 등 남자는 이렇다는 걸 알아달라는 말로 가로채임 당하지 않았으면 싶다. 여성인 나는 평생의 억울함을 터놓는데 잠시의 억울함도 견디지 못하고 끼어드는 말, 이젠 그만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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