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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l 18. 2019

‘일’이 나를 구원(?!)해줄거야

퇴사하고 읽은 책 - 여자전쟁

여자들이 왜 일하고 싶어하겠어요? 그들은 묻는다. 일만이 여성들에게 자존감과 지적인 자극, 성인들끼리의 친교와 재정적 독립을 가져다준다. (115쪽, 여자전쟁)


퇴사 후 1년 쉬고 사회로 돌아가는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울 줄 알았다. 나는 무슨 배짱이였을까. 이제는 메인이 육아이고, 카페아르바이트에서 버는 용돈으로 지낸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 삶을 사는 중이다.


월급에 길들여진 삶은 아름다웠지만 일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면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느라 감이 없었다. 지금 하는 일이 불만족스러울 때, 나는 과거를 추억하며 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후회한다. 안정된 일에서 떠나 경험하며 배우는 중이다.


내게 일은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을 때 하는 경제적독립의 의미였다. 퇴직금으로 지내지만 월급이 통장에 꽂히지 않아도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모색하는 손쉬운 방편으로 남편이 사장인 카페에서 보조하며 용돈을 번 지 6개월이 흘렀다.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 것처럼 보이고, 회사에 소속된 이들이 보기에는 남편가게에서 일하는 팔자 좋은 인간유형을 자처한다. 남편가게가 아니라 서류광탈이 이어질지라도 나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회사에서 했던 콘텐츠 제작을 하지 않은지 1년 4개월이 지났다. 남편가게에 필요한 포스터를 만들고 커피 아닌 메뉴를 개발하면서 풀지 못한 창작의 욕구를 해소한다. 글쓰기모임에서 책을 읽고 영감을 받은 한 줄에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일단 써 내려간다.


7월부터 아침단골손님이 늘어서 출근이 2시간 앞당겨졌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는데, 늘 열려있는 마트 문이 닫혔다. 그런 아침 풍경이 그리웠는지 기분이 좋았다. 육아에서도 빨리 해방되었고, 나 자신으로 사는 순간이 주어지는 살 것 같았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는 혼이 나가고 멘탈이 흔들리니까 몰입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줄 알았다.


사진 = unsplash


처음에 남편가게에서 일하면서 점심 먹고 찾아오는 직장인손님과 내 처지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나도 점심 먹고 커피를 물처럼 마셨을 때 그들 같은 모습이었을까. 일을 가면 주3번을 마주하니 손님이 걸어 다니는 메뉴판처럼 읽힌다. 이 분은 아메리카노 2잔, 저 분은 얼어 죽어도 라떼, 저기 언니는 매일 아이스초코만 먹고, 그는 연유라떼만 찾는 식이다. 일하는 시간 동안 정한 액수만큼 팔면 해당되는 금액을 일당으로 받는다. 평균 3만5천원에서 5만원 사이다. 신메뉴를 런칭하면 팔린 만큼 카카오뱅크에 꽂혔다.


퇴사 후 나는 가계부를 적지 않는다. 이십대부터 자취를 해서 습관처럼 한 달 예산을 짜고 정해진 한도에서 생활했다. 월급이 들어오질 않으니 가계부 쓰는 일이 무의미했다. 일당을 받지만 쓰는 곳이 많지 않아서 관리하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 현실육아로 친구를 만나는 일도 줄고 내 생활은 남편과 11개월 된 아기가 삶의 큰 지분을 차지한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땐 말할 상대가 없다고 느껴 외로워진다.


글쓰기하면서 삶의 부당한 영역은 풀어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돈은 용돈벌이만 하고 글쓰기나 실컷하자 싶었다. 엄마와 청소하면서 그림도 그리는 <저, 청소 일하는데요?>의 작가처럼, 나는 커피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쓰면 될 줄 알았다. 글쓰기과제로 지인을 인터뷰하고 내 안의 묻어둔 욕망이 건드러지고, 만져졌다. 평생 글쓰는 삶을 살겠다는 거대한 목표를 정하곤 공모전 사이트를 들락거려봤다. . 요즘은 콘텐츠 제작으로 검색해서 지금 사는 동네에 일자리가 없나 취업사이트를 돌아다닌다.


남편가게에서 하는 일은 최소한으로 자립하는, 철저한 수단이다. 전에 했던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새 길을 가도 될까. 남편이 커피를 하니까 나는 차 공부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빵이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고, 내 일에 주체성을 갖기 위해 차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발상이다. 티소믈리에 공부를 할까 망설이는 중이다. 최근 우리나라 1호 티믹솔로지스트가 가게 문을 닫았다. 대만에 판권도 팔렸고 책도 3쇄까지 인쇄한 이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한편으론 글을 못쓰니까 지금 주어진 다른 일을 하려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


혼자 카페를 맡아 운영할 능력은 쪼렙이고, 돈은 많이 벌고 싶은 검은 속내가 밝히 보인다. 내 삶을 언어로 소리내어 나눌 동료가 필요하고, 편하게 일하고 싶어 다시 회사인간을 꿈꾼다. 아니면 남편가게에서 일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할 것인지 나 자신과 타협이 필요하다. 술에 술 탄 듯 물 탄 듯 이도 저도 아니라 스스로 힘겹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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