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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머금은 한 방울

김창열_ 물방울 SH87032, 1987

by 전애희
SE-e2e9896a-315d-11ef-b94b-0bc04200bf7c.jpg 김창열_물방울 ENS203, Water Drops ENS203, 1979 182x227.5cm


눈물

난 눈물이 많다. 그림책을 읽어주다 아이들 몰래 눈물을 닦았고(행복한 왕자가 그렇게 슬픈 책인지 그때 알았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책(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펑펑 울다 곤히 잠든 남편 깰까 조심스레 코를 풀기도 했다. 가을볕 좋다고 산책 나갔다가 들은 노래 한 소절(윤종신의 ‘좋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 당황하기도 했고, 넷플릭스 드라마(폭싹 속았수다) 보며 울다가 다음날 팅팅 부어오를 얼굴을 떠올리며 드라마 시청을 멈추기도 했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감동하며, 공감하며 우는 나에게 미술 작품 앞에서 흘린 눈물은 아주 특별했다.


지난해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전시회(영롱함을 넘어서)에서 첫 작품으로 만난 182 x 227.5cm 크기의 <물방울 ENS203, 1979> 작품은 참 웅장했다. 커다란 캔버스 안 영롱한 물방울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되었다. ‘이 눈물들(물방울들) 모두 내 손으로 받아주고 싶다. 내 두 손으로 모두 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울림은 여과 없이 눈물이 되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SE-500d1919-b990-11f0-b5ae-9bedee4940b7.jpg 김창열_ 물방울 SH87032(Waterdrop SH87032), 1987 캔버스에 한지와 유화 물감 | 190x300cm | 서울미술관 소장

수많던 물방울이 딱 한 방울 남았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난히 더 영롱한 김창열의 <물방울 SH87032, 1987>이다. 더 고요해지고, 아득해진 세상에 남은 물방울.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건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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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확대 / 페르메이르_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눈물 한 방울

책을 덮었다. 사실 난 뒷이야기들도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그의 죽음과 하루하루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더 이상 넘길 수가 없었다. 눈처럼 하얀 겉표지에 <눈물 한 방울>이 새겨진 이 책의 주인공은 2022년에 작고하신 이어령 문학평론가다. 2019년부터 영면에 들기 한 달 전까지 손수 쓴 글이 담겨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써 내려간 글들을 따라가 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 2020. 7.5.


삶에 대한 간절함이 담겨있다.

옛 책 생각이 나 꺼내 읽다가

눈물 한 방울

너도 많이 늙었구나(낡았구나). - 2020. 8. 15.


추억이 서려있다.


또 만나 라는 말에

눈물 한 방울

언제 또 만날 날이 있을까? - 2020. 8. 19.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암 선고를 받고 난 뒤로 어젯밤에 처음,

어머니 영정 앞에서 울었다. 통곡을 했다.

울고 또 울었다. 엉엉 울었다. -2021. 7. 30.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암 선고 후 15개월 정도 투병하시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눈물이 나왔다. 말씀하실 기운조차 없어 눈빛만 주고받던 날들. 아버님은 무슨 말을 하셨을까? 내가 그 마음 온전히 알아들었던가? 아버님은 마음속으로 눈물 한 방울 뚝! 흘리셨겠구나.


물방울

항암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버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 초보 도슨트 며느리의 요청으로 다 같이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에 갔다. 아버님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한 미술관. 아버님은 힘드셨는지 전시실 밖 의자에 앉아 쉬고 계셨다.


프랑스 파리 한 마구간에서 지내던 김창열은 다시 사용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물을 뿌렸다. 물을 머금은 캔버스 위 물방울이 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발견 한 작가는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국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던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은 같은 시기의 아픔과 배고픔을 겪었던 아버님에게 공감의 물방울이 되었을까? 난 묻지 못했다. 전쟁의 아픔을 모르기에, 괜히 상처를 건드릴까 봐.


물 한 방울이 내 온 마음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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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다, 짧은 시도 지어보았다.

뚝!

전애희

아가가 운다.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아가야,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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