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아버지의 마음을 샀다.
20여 년쯤의 일이다.
어느 날, 오래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한 중국인 중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중국의 이름난 중의과대학 출신이라 스스로를 소개했고, 한국으로 치면 한의사에 해당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피곤과 초조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말없이 자리에 앉은 그는 붉은색 비단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인 물건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자, 오래된 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세월의 결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청나라 시기의 의학 경험방 서적이라 설명했다. 단순한 고서가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소장해 온 귀중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딸이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학교로 유학을 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과 한국 사이의 환율 차이가 너무 커 등록금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어떻게든 딸의 학업을 이어가게 해주고 싶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아끼던 이 책을 팔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었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심지어 중국의 권위 있는 학회에서 발급받았다는 공증 보증서까지 꺼내 보이며, 이 책이 진품임을 강조했다. 말끝은 점점 떨렸고, 급기야 내 앞에서 바짓가랑이를 붙잡다시피 하며 도와달라고 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책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의심이 먼저 들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서 넘어오는 물건들 중에는 위조품이나 짝퉁이 적지 않았다. 특히 고서나 골동품 분야는 더더욱 그랬다.
‘이게 진짜일까?’ ‘보증서도 혹시 가짜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그 책을 사게 되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선택에 가까웠다. 딸의 등록금을 마련하려 애쓰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딸을 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내 딸이라면…’ 그 생각 하나가 모든 계산을 무너뜨렸다. 나는 결국 그 당시 대학 등록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에게 건넸다. 책값이라기보다는, 어떤 사연에 대한 응답 같은 돈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붉은 보자기를 정리하듯, 자신의 마음을 추슬러 떠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 만난 적이 없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그 책은 지금도 내 서재 한편에 그대로 놓여 있다. 한 번씩 먼지를 털어내긴 하지만, 사실 깊이 들여다본 적은 많지 않다. 그 책이 진짜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조품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보증서 역시 마찬가지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 마음먹으면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상하게도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 그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붉은 비단 보자기,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눈빛. 그의 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을까.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은 힘들지 않았을까. 지금은 어딘가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책을 사지 않았다면, 그의 딸의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갔을까. 혹은 결국 포기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 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보증서가 진품인지 위조인지. 그 모든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한 아버지의 마음을 샀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은 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사기였다고 해도 괜찮다. 그 돈이 누군가의 절박한 순간에 쓰였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이 조금 더 나아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지금도 가끔 그 책을 바라본다.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은 그 위에는, 단순한 종이의 무게가 아니라 어떤 기억의 결이 쌓여 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이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지구 어딘가에서, 그 아버지와 딸이 조용하고 단단한 행복 속에 머물러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