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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적기업 불나방 May 29. 2020

03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거짓말

물론이죠! 당신도 사회적기업학 석사가 될 수 있습니다!


1


  I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제가 나이가 많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저희 석사과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요."

  "예, 그럼 도전해보겠습니다."

  "나이, 성별, 직업, 국적, 전공 관계 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적혀있죠? 힘내세요."


   I는 3명에게 사회적기업학 석사과정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그중 2명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1명은 통화와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눴다.

  I는 그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말해주었는데 3명 모두 I에게 대단하다,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했다. I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석사과정 서류전형 합격자 발표가 있고 얼마 후, I는 3명에게 문자를 받았다.

  

  'I님, 귀한 만남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애써보았는데 역량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도 I님을 만난 것이 축복이었답니다. 항상 힘차게, 희망 넘치게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을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십시오.'


  '떨어졌어요.ㅎㅎ. 좋은 소식 전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I씨, 감사하고 고마웠어요. 다시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꼭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라요. 건강하세요.'


  'I씨, 고마워요. 지원자가 워낙 많았으니... 내년에 또 지원해보려고요. 이제 깁스 풀고 물리치료하고 있어서 이동이 원활하지 못해요. 이달 말 즈음에 운전 가능하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차 한 잔 해요. 정말 고마웠어요.'

 



2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잘 만들기 위해 석사과정에 진학하고 싶다던 분, 명문대를 나왔고 다른 석사학위가 있지만 사회적기업 석사학위를 따서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던 분, 지금은 학교 선생님이라서 힘들겠지만 연차를 끌어써서 사회적기업에 대해 공부해서 배운 것들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던 분, 3명 모두에게 탈락 문자를 받았다.


  I는 많이 허탈했지만 워낙 지원자가 많았었기에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3명, 모두 떨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지원자가 많았었기에 3명 모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쉬움과 속상함을 달래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었다.

  

  일주일 후 석사과정 면접 전형이 진행되었다. 면접 전형 현장 진행요원으로 참여한 I는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네.'


  "오늘은 어려보이는 사람들이 많네요. 지난 번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쵸?"

  "네, 맞아요. 나이드신 분들은 거의 없네요. 석사과정 입학설명회 때는 꽤 계셨는데. 다 탈락했나봐요."


  진행요원들도 I와 같은 생각을 했다. 면접장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I는 면접자들을 면접이 이루어지는 교수들의 방으로 데려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왜 거의 다 젊은 사람들일까? 입학설명회 때 참석했던 그 많은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왜 여기 없을까? 서류를 안냈을까? 전부 서류 탈락했나? 석사과정 지원 자격에 나이 제한은 없었는데, 서류 불합격 기준에 나이 제한이 있었나?'

  면접 내내 I는 생각했다.

  '왜 떨어졌을까. 3명은 왜 떨어졌을까. 뭐가 부족해서 떨어졌을까. 나이가 많아서 떨어졌을까.'




3


  면접은 끝이 났고, 면접 진행요원들은 석사과정 지원자들이 낸 서류를 파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서류를 파쇄하던 중 I는 서류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이분은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꼭 공부를 하고 싶다던 그분인데. 서류를 아주 많이 내셨네. 나이도 있으신 분이 서류 작성하기 정말 힘들었겠다. 그런데 서류가 너무 깨끗한데...... 이거 면접관들이 읽기는 했을까.'

  

  누군가가 읽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깨끗한 서류였다. 인쇄한 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낙서도 하나도 없었다.접힌 흔적도 하나도 없었다.


  '이건 아무도 읽지 않았다. 그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쓴 이 서류를 아무도 읽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읽지 않았다.'  

 

 I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석사과정에 큰 회의를 느꼈다.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는 '투명', '정직', '공정'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정반대의 단어들이 가득한 곳이라 여겨졌다. I는 석사과정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무도 읽은 흔적이 없는 깨끗한 서류 하나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들갑이라고 하기엔 I가 파쇄한 깨끗한 서류들이 너무나 많았다.




4


  "XX!"


  I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연구와 창업을 통한 사회 혁신! 누구나 이곳에서 함께 사회 혁신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입학설명회 현수막 문구와 '누구나 지원할 수 있어요. 나이 생각하시지 마시고 힘내세요.'라고 3명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I의 앞으로 우연히 깨끗한 서류들이 많이 왔을 수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점수에 밀려서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다. I도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뿐이었다.

  I는 면접관들에게 지원자들의 서류를 다 읽어봤는지, 어떤 기준과 과정으로 합격자들이 결정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이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자신을 지도하는 교수들인 면접관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가 자신이 학위를 받는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I의 이 생각은 오랫동안 머리에 머물렀다. 


  'XX......'

  

  면접 진행 요원의 마지막 업무를 마무리하고 I는 집으로 돌아갔다. I는 깨끗한 서류에 대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간절한 눈, 희망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던 3명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학사모를 쓴 자신의 얼굴이 그들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누구나 지원할 수 있지요? 저도 지원할 수 있지요?"


  이후에도 종종 I는 사회적기업학 석사과정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I는 고민에 빠졌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잊고 희망을 주는 거짓말쟁이가 될지, 아니면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고 절망을 주는 참말쟁이가 될지.








 나의 비전은

거짓말이 될 것인가, 참말이 될 것인가.






 * '이상한 사회적기업, 이상한 사회적경제'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를 접하며 '이상한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분들은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이상한 것인지, 사회적기업과 사회적경제가 이상한 것인지 함께 이야기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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