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만 오천 원 써줄 수 있어?
글로 만난 사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근황을 묻는 중에, 내가 월급쟁이 의사인 사실에 놀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한동네에 살며 몰려다니던 오래된 친구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다.
“이 병원 내 것 아니고, 나 그냥 월급 받는 의사야”라고 말한 것이 그저 농담인 줄로만 알았나 보다.
중·고등학교, 대학, 인턴, 전문의 과정까지 다 지켜본 친한 친구조차 나에 대해 잘 모른다. 하긴,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나는 물었다.
“너, 나를 위해 만 오천 원 써줄 수 있어?”
“백오십만 원도 아니고 만 오천 원? 그 정도야 써줄 수 있지. 너 무슨 사업하니? 뭔데,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시작은 2021년 신축년이었다.
“선생님을 영상으로 담고 싶습니다.”
<브런치>에 올린 글의 조회 수가 폭발했다. 작정하고 쓴 첫 글이었다. 내 글을 본 기자가 연락이 왔다. 나를 취재하고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했다. 유튜브 구독자 500명, 블로그는 그보다도 못했던 그때. 일개 의사일 뿐인 나를 일약 스타 덤에 올려줄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 수 있구나.'
기자는 자신들의 유튜브에 내가 나오면, 내가 좀 더 빨리, 더 유명해질 거라고 했다. 구독자 수가 순식간에 늘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아무리 영상을 만들고 글을 써도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의 제안은 매우 솔깃했다. 뿐만 아니라 짧은 통화에서 그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의사이자 환자인 나 그리고 봉직 의사, 워킹맘으로서의 나인 진료실 안팎을 넘나드는 나의 모습을 잘 담아줄 것이 분명했다. 그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도 일치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삶의 일부를 드러내 이해를 넓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진료실 안과 밖. 그가 그릴 영상을 그려보았다.
씬 1. 집에서 병원으로 나서는 출근길이다.
아이를 꽉 한번 안아주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사랑해요”라는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선다. 아차, 내가 늘 가지고 다니 는 명품 가방. 오래된 것이지만, 이 가방 뺄까 말까 하고 고민을 한다. 하지만 늘 가지고 다니던 거니까,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빼지 않기로 한다. 내 영상을 볼 미래 독자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나의 명품 가방에 대한 품평회다.
씬 2. 국산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모습. 최근 노후 경유차를 폐차하여 내 차가 없다. 친정엄마가 우리 집으로 출근하면 나는 바통 터치를 한다. 엄마 차를 몰고 출근을 한다.
‘의사도 자동차, 별거 없네’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씬 3. 병원에서 환자를 돌본다. 아, 가운부터 깨끗하게 빨아 야겠다.
씬 4.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저 의사는 친정엄마가 살림을 거의 다 살아주네. 아이도 봐주고. 그러니 저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부러움과 질투의 말이 동시에 들린다. 아침 일찍 아이를 다독이고,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나는 출근을 서두른다. 자차를 이용하여 출근을 하고 병원에 앉아서 환자를 본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다시 돌아간 다. 이 짧은 순간에 10분 남짓의 영상으로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보여 줄 수가 없다. 나를 설명하기에 영상은 턱없이 부족하다.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의사에 대해 자리 잡은 편견이 있다. 아무리 새로운 정보가 설득력이 있어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오해는 시작된다. 나를 담을 테지만, 내 손을 떠나 타인에 의해 만들어질 영상이 사람들의 오해를 얼마나 줄여줄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에게 덜 중요한 사람일수록 최소한의 생각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인지적 구두쇠’다. 듣도 보도 못한 어느 동네 의사에 대해 무턱대고 열린 마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출연을 고사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때 큰 기회를 놓친 것인지 모른다. 나는 지름길이 있어도 가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원한 것은 오해 대신 이해였다. 이해를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나에 대해 내가 직접 이야기해야 했다. 돌고 돌아도 내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다독하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 졌다는 사람과는 달랐다. 교과서밖에 모르던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 흩어지는 생각들을 붙잡기 위해 틈틈이 메모를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며 유레카를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소재, 괜찮은 문장은 꼭 샤워하는 도중에 튀어나왔다. 덕분에 샤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키보드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날에는 밖으로 뛰어나가 거리를 달렸다. 괜찮은 글을 쓰기 위해, 글 쓰는 즐거움도 모른 채 글쓰기에 매진했다.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혹시라도 글 쓰는 감을 잃을까 봐서였다.
2년째. 타닥타닥. 새벽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음을 태웠다. 어느 날, 새벽에 깨서 내 키보드 소리를 들은 남편은 ‘비가 오나 보다’라고 생각했단다. 그렇게 우리 집엔 날마다 비가 내렸다. 쌓인 글이 70개가 넘었다.
요즘 나는 글을 통해 사람들을 만난다. 글로 만난 사이는 긴말이 필요 없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내 글을 읽어준 독자는 나의 남편이나, 나의 절친한 친구들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가끔은 나조차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확률이 높다. 모든 글은 내가 썼지만, 그 글들은 지금의 내가 아닌, 그때의 내가 쓴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때 쓴 내 글을 읽은 사람이다. 글을 읽는 수고로움 때문인지, 오해는 이해가 된다.
내 글을 보고 누군가는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내 손을 거쳐 내가 쓴 글이고 나의 글쓰기 실력이 부족해 나를 오해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글이라 몸을 사리게 된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때도 있다. 가끔은 나의 글들이 나를 너무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경계한다. 나는 완벽하게 괜찮은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나를 괜찮다고만 느끼게 될까 두렵다.
잘하고 싶은 마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다. 글을 쓸 때도 너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단속한다. 때로는 나에 대해 실망하는 글이 반갑다. 글로 만나 가끔은 서로에 대해 실망하고 또 응원하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제 그 결실을 맺으려 한다. 책을 내는 것.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에 주저함은 없었다. 글을 쓰면서부터 내 안에 있던 소망이었다. 출판사의 제안에 '아직은 책을 출간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글의 내공을 좀 더 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쯤 그동안 써왔던 글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글을 써야 할 시기가 왔다. 두 번째 책을 위해 첫 번째 책부터 출간해야 했다. 책을 만들기로 했으면 책을 팔아야 할 것이므로 나는 친구에게 책 영업을 한 것이다. 친구로부터 책 한 권 기꺼이 사주겠다는 다짐을 기어코 받아냈다. 응원의 말도 함께 들었다.
“멋지네. 나는 네가 하는 모든 것을 응원해.”
내가 출간하기로 한 이유는 내가 의사가 된 이유와 같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책으로 만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3평 진료실의 공간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 진심을 전하고 싶다. 책을 출간하고 지금보다 알려져 내가 하는 건강에 대한 잔소리에 더 힘이 실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