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가. 우리 또 전학가?
무관심한 시선
드르르륵. 문이 열렸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제발 아무도 나만 바라보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나를 뺀 모두가 익숙해 보였다. 춥고 떨렸다. 차가운 교실은 창백한 내 얼굴을 더 새하얗게 보이게 했다. 시골에서 꽤 잘 나가던 경상도 가시나는 얼어있었다. 겨울방학 내내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생님이 나를 소개했다. 이제 모두 나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이 교실에서 내가 부를 수 있는 친구는 없다. 내 세상의 전부였던 경상도 어디를 아는 친구도 없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처음 받아본 무관심한 시선이었다.
경상도에서 근무하던 아빠가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첫 이사였고, 첫 전학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의 끝. 전학생이 온 그 날은 겨울 방학이 끝난 개학날이었다. 전학생인 나에 대한 소개는 서운하리만치 짧았고, 3 분단 맨 뒤쪽에 앉았다. 이어서 담임 선생님은 겨울방학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물었다.
'저요, 저는요. 겨울 방학 동안 경상도에서 여기로 이사했어요.'
머릿속으로 이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전학 오기 전 초등학교에서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건 마땅히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무려 회장이나 했던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잘 나가는 소위 핵 인싸였다. 아무리 그래도 전학생이 첫 번째로 발표하는 것은 무리였다. 맨 처음 손을 든 애는 남자애였다. 나는 두 번째쯤에 손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충격이었다. 그 애는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와, 서울말은 어른들이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랑 동갑내기 친구가 표준 서울말을 쓰고 있다니. 두 번째로 발표하겠다는 내 바람은 마땅히 사라져야 했다. 발표했다가 나도 모르게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봐 손들 수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괜찮았다. 겨울의 끝자락이었고, 새로운 학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에겐 봄 방학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서울말을 쓰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없었다. 새 학기에는 꼭 서울 표준말을 써야 했다. 모두가 새로운 새 학기에 전학생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서울말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단어의 처음을 강하게 내는 경상도 억양을 고치기 위해 말하고 또 말했다.
'친구야, 안녕?'
그리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완벽한 서울말이었다. '하면 된다'는 우리 집 가훈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걸 안 순간이었다. 훗날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전화를 몰래 엿들은 엄마는 나의 어색한 서울말에 할 말을 잃었다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경상도 사투리도 쓰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출발선의 위치는 달랐다. 이미 같은 반이었던 친구, 유치원에서 알았던 친구 등. 그들에겐 이미 인연이 있는 친구가 한 둘 쯤은 있었다. 그중 몇몇은 인지도가 있었고, 대개 그런 친구들은 반장 선거에 나갔다. 그러나 교실에서 내 이름을 아는 친구는 없었고, 스스로 반장 선거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용기도 없었다. 반장 선거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모두가 부러웠다.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반장이 하고 싶었던 건,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경상도 시골에서 학급의 핵심이었던 나. 선생님에게 불려 다니고, 책상에는 친구들이 북적거리는 그때. 나를 보고 엄지척 해주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던 그때가 그리웠다. 고향의 향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향수를 달래기 위해 반장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것이다.
2학기를 노렸다. 그리고 노력했다. 성실하고 친절하기. 드디어 2학기에 반장 선거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겸손의 의미로 나는 다른 친구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너무 겸손을 떨어서였을까. 전혀 아쉬울 것 없이 똑 떨어졌다. 몇 표 받지 못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면 된다'는 집안의 가훈을 지은 아빠를 의심했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새 학기에 나는 더 이상 전학생이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도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생겼다. 드디어 반장선거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새 학년 1학기 반장은 웃기는 아이, 재미있는 아이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반장선거 후보 연설을 특출 나게 잘하는 아이 한 둘은 꼭 있었다. 그런 아이는 대개 남자였고, 웃기면서도 활발한 그 남자애는 반장이 되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 뭐든지 삼세판은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빠를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하면 된다'는 우리 집 가훈을 한번 더 믿었다. 그리고 나에겐 2학기가 남아 있었다. 마침 2학기 반장 선거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남자 반장과 여자 반장을 따로 뽑는다는 것. 후보 연설로 순식간에 교실을 웃기는 남자애들은 더 이상 내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1년 반 동안 쌓아둔 인지도로 드디어 나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나의 당선이 확실했다. 나는 그렇게 반장 선거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때 보다 치열한 경쟁이었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이번엔 내 이름 석자를 꾹꾹 눌러썼다. 스스로에게 자선표를 주고 당선되기를 기도했다. 당선이었다. 여자 부반장이었다. 비록 반장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뭐라도 됐다는 사실이 내게 중요했다. 그리고 우리 집 가훈을 다시 봤다. 그렇다.
아빠는 '하면 된다'라고 했지, 하면 '반장 된다'고는 안 했다.
부반장에 당선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내 몸이 그렇게 가벼웠던가. 그때 그 가벼웠던 발걸음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여자) 부반장 되었어. 전학 안 가면 안 돼? 안되면, 나 그러면 지하철 타고 다닐래. 일곱 정거장만 다니면 되는데. 엄마, 나 전학 가기 너무 싫어."
그 무렵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세 계약 만료가 다가왔고, 새로운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과 가까운 곳의 집값은 비쌌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점점 더 멀리 외곽으로 밀려나야 했다.
내가 반장에 당선되면 전학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나는 이번 반장 선거에 열과 성을 다했다. 무엇보다 이건 1년 반을 치밀하게 공들인 결과였다.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거였는데. 이번에는 부반장 하고 다음에는 반장 할 수 있었는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게 여자 부반장은 임명되고 한 달도 안되어 교실을 떠났다.
"아빠. 나, 이제 '하면 된다'는 진짜 아빠 말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런데, 아빠 어디 가. 나 또 전학가?"
다시 또 전학. 낯선 곳에서 받게 될 무관심한 시선이 두려웠다.
또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