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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Feb 17. 2022

아버지에게 진단명은 비밀로 해주세요.

*****환자에게 진단명 비밀

내과 전공의 시절 종양내과를 돌던 첫 번째 주. 진료 차트 맨 앞에 별이 가득인 환자를 만났다.


환자에게만은 진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배우자 혹은 자녀들이 원한다. 그 진실이란 환자의 진단명인 암이며, 진단명 비밀이라는 주문은 대부분 노인 환자에게 해당된다. 진료차트에 별이 다섯 개나 붙어 새로운 전공의, 간호사가 실수하지 않도록 한다. 별이 가득한 환자를 처음 대면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 오늘 다섯 번째 항암 치료시죠? 컨디션은 어떠세요?

- 네, 괜찮습니다.


환자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는 진단명은 말하지 않았지만, 항암 치료 중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뒤늦게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덮을 수는 없었다. 보호자를 따로 만났다.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하게 말할 수 있냐며 질색할 것으로 예상했던 보호자는 이렇게 말했다.

-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보호자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한 나는 진료 차트 맨 앞장의 별 다섯 개를 지워버렸다.




여기 또 효자 아들 셋이 있다. 수술 결과 폐암이 확실해 지자, 효심 가득한 아들 셋은 모의(謀議)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암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야 한다고 했다. 암을 진단받았다는 충격으로 아버님은 모든 치료를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삼 형제의 모의 작당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없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별 다섯 개가 그려진 많고 많은 환자 중에 한 명이 될 것이다.


자녀들은 왜 암 진단을 숨기려 할까?

이건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도에 보고된 <의사의 노인 암 환자에 대한 차별 : 암 진단 고지와 치료 설명을 중심으로 >에 따르면 자녀들은 다양한 이유로 부모에게 암 진단을 숨기고자 했다.


자녀들이 병명을 감추고자 하는 이유는 부모를 위해서다. 부모가 받을 심리적 충격을 염려하고, 정신적 충격으로 병이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치료를 포기할 것이라고 어림짐작한다. 일부 노인들은 암의 선고를 죽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암 진단 고지로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 같다. 부모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하에서 자란 자녀에게 암 진단 고지는 말하기 힘든 진실이다. 때때로 부모의 건강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대화가 어렵거나 인지 장애가 있는 노인의 경우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부 자녀들은 감당해야 할 치료비나 간병 등을 회피하기 위해 암 진단 고지를 하지 않으려 한다.


 진단을 받은 노인들 마음은 어떨까?  

암 진단을 고지받은 노인의 생각은 자녀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랐다. <암 진단 고지에 대한 암 환자의 인식>이라는 보고에 따르면,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첫 느낌은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편안했다(29.3%)'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많은 자녀들이 걱정하는 대로 치료 포기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슬프고 우울했다.'라는 감정은 13.8%뿐이었다.


당신이 암에 걸렸다면?

그렇다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 당신이 암에 걸렸다면, 진단명이 비밀에 부쳐지기를 원하는가. 국내에서 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환자 100명 중 96명은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어 했다. 의사들 다수도 환자가 진단명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암 진단 고지의 필요성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매듭짓는 기회는 흔하게 오지 않는다. 따라서 암 진단 고지는 환자에게 일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주는 일이다.


암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여러 번의 치료와 검사. 그에 따른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협조다. 환자는 내 몸의 주인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나 자신에 대해, 더 나아가 삶에 대해 이해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보호자는 치료 가능하며 가벼운 어떤 질병을 지어내야 한다. 선한 의도로 시작했던 거짓말이 다른 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자녀들의 말대로 가벼운 질병으로 치료를 하는 것뿐인데, 고통스럽고 힘들다면 가벼운 질병조차 견디지 못하는 환자는 스스로 나약한 존재라고 느낄 수 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결국에는 알게 된다. 평생 한 번도 연기를 해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 한 사람을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 암 수술 후 항암치료, 앞으로 일어날 예상조차 할 수 없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가족들은 물론이고 모든 의료진이 끝까지 비밀을 지키기란 힘들다. 암이라는 사실을 숨긴 후 뒤늦게 밝혀졌을 때 환자는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암 진단 고지 정답은 없는 일

하지만 누군가에겐 진단명을 알리는 수고로움이 필요하지 않다. 인지 장애가 있거나 연로하신 경우, 환자의 상태가 급변하여 적극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등 환자에게 진단명을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있다. 환자가 자신에 대해 전혀 몰라도 되거나 알 필요가 없을 때에는 모두 함께 잠시 눈을 감아 주는 일도 필요하다. 궁극적인 목적은 환자를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하여 각자 개별 상황에 맞게 접근해야 한다. 환자에게 진단명을 알리는 것에 정답은 없다.



처음에 아버님에게 진단명은 비밀이었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버님에게 당신을 괴롭게 한 정체가 폐암이었고 앞으로는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은 담담하셨고,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다. 아버님에게 폐암이라는 진단명을 알리지 말자고 했을 때 나는 그 비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끝까지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결코 눈치채지 못할 아버님이 아니었다. 온 가족의 낯빛이 그토록 어두웠던 시기는 없었으니까.

 

거짓말은 놀라거나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시작된다. 환자에게 진단명 비밀은 거짓말과 같은 이유로 출발한다. 우리는 부모의 아픔이 처음이라 당황함에 진실을 가리고자 했다. 하지만 모든 고백이 그렇듯 비밀을 털어놓고 나면 가벼워진다.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 이제는 우리의 공통 목표인 암 치료에 집중하고, 우리보다 더 많은 세월 모진 풍파를 견뎌낸 아버님의 단단함을 믿고 응원할 때가 왔다.


※참고 문헌

1) 임연옥 외. (2016). 의사의 노인 암 환자에 대한 차별: 암 진단 고지와 치료 설명을 중심으로, Korean J Health Promot, 16(2) : 101-110

2) 임연옥 외. (2013). 암 진단 고지에 대한 암 환자의 인식, Asian Oncol Nurs, 13(2) : 59-66

3) Yun YH et al. (2004). The Attitudes of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Toward the Disclosure of Terminal Illness, J Clin Oncol, 22(2) : 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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