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트랙 위의 마라토너다. 마라토너에게 아무리 훌륭한 코치, 좋은 훈련 프로그램이 있어도 자신이 달리지 않는다면, 멈출 수밖에 없다.
- 나 이제 치료 그만 받으련다. 너희들도 고생이고.
응급실에서 퇴원을 기다리던 아버님은 더 이상 항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수술 후 한 달째. 본격적으로 보조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4주 간격으로 4번, 3주간 항암 치료를 하고 한주 쉬는 스케줄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버님은 체력이 많이 떨어된 상태에서 진행된 항암 치료를 무척이나 힘들어하셨다. 항암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세포를 조준하지만, 동시에 우리 몸의 정상 세포에도 영향을 미친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하지만 그 빈대가 미쳐 날뛰고 초가삼간을 잡아먹으려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님은 솜이 물에 젖어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말이 없으셨지만 더욱더 말을 삼갔다. 잠깐의 거리를 이동할 때조차 휘청거려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좀처럼 곁은 허용하지 않았다. 평생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 보지 않았던 고집 때문이었다.
첫 번째 항암 치료 이후 화장실 정도는 혼자 갈 수 있다고 장담하던 아버님은 닿으면 무엇이든 잡을 수 있는 좁은 화장실에서 어느 곳도 잡지 못한채 쓰러지고 말았다. 토요일 오후 119 구급 대원에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입술이 터지고 코 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했다. 간단한 조치를 하고 퇴원을 기다리던 찰나 아버님은 치료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단 한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폐암이 재발할 것이 뻔했다.
항암요법을 받은 환자 10명 중 6명(64.6%)이 부작용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치료를 중단한 사람은 1명 (11%) 정도다.
환자에게는 치료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종교적 이유, 삶에 대한 가치관, 치료에 대한 불신, 부작용에 대한 염려 등 다양한 이유로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처치라고 하더라도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반하여 치료를 강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치료를 거부하는 걸까.
환자들은 다양한 부분에 대해 걱정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암 환자들이 가장 염려하였던 것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 치료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문제 등 다양했다. 적지 않은 연구에서 암 환자의 절반은 가족에게 미칠 영향을 가장 많이 염려하고 있었다.2그들은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이나 통증, 두려움과 함께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겪을 일에 대해 걱정한다. 특이 한 점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의 걱정은 암 진단 이후의 죽음,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대부분이었고, 가족에게 미칠 영향은 14% 뿐이었다. 반면 국내 연구에서는 자신의 질병으로 영향 받을 가족을 먼저 염려하는 비율(44.4~50.5%)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서양에 비해 한국인의 경우, 부모 부양의 의무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보다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님의 경우 항암 치료 이후 급격하게 떨어진 체력 저하와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그만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를 어떻게 설득시킬까. 설명, 이해와 공감
치료를 권하는 의사와 이를 거부하는 환자. 서로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것은 정보의 비대칭 때문일 수 있다. 의사는 치료가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때에 권한다. 더 이상 항암치료가 의미 없는 말기 암 환자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강요하지 않는다. 환자는 치료를 거부할 자기 결정권도 있지만, 그보다 우선하여 자신의 상태, 자신이 받을 치료에 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의학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자기 결정을 하기 어렵다. 의료진은 환자의 증상, 진료의 내용 및 필요성, 예상되는 위험성 등 진료에 동의하거나 거절 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3)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치료를 거부한다면, 의사(醫師)는 환자의 의사(意思)를 존중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저자의 아버지는 대장암 말기를 진단받은 의사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이어가던 그는 항암 치료의 부작용과 암의 재발로 치료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한 결정이 있기까지 그는 자신의 딸이자 의사인 저자와 함께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사실과 증거를 기반으로 자신의 의지를 반영한 그의 치료 거부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환자가 겪었던 일에 대해 공감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어느날 갑자기 환자가 된 그들은 모든 것이 낯설다. 그들 앞에는 두렵고 예상하지 못했던 길이 펼쳐진다. 환자는 그 길을 홀로 가야 한다. 환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 길을 간접 체험할 뿐이다. 그들의 경험, 두려움과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는 데에서 공감은 시작된다.
아버님은 진행된 폐암 3기였지만, 폐암 치료를 포기할 단계가 아니었다. 수술로 눈으로 보이는 암은 없어졌지만, 완벽하게 암세포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영상검사나 수술 중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잔존암 가능성이 있었다. 완치를 목표로 하는 것이기에 수술 후 보조 항암 치료를 받아야 치료는 종료되는 것이다. 아버님에게 항암치료가 힘들겠지만, 세번 정도는 더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드렸다. 다만, 전과 달라진 아버님의 체력을 받아들이고 주치의와 상의 끝에 표준 용량의 20%를 줄여 항암 치료를 이어갔다.
그 누구도 트랙 위의 마라토너를 위해 대신 달려 줄 수 없다. 마라토너가 멈추려 할때,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토너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현재의 상태와 트랙 위의 장애물을 예측하고 격려한다.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톤에서 뿐 아니라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장치다. 심장이 느리게 뛰는 부정맥 환자에게 주기적으로 전기 자극을 주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유지한다. 페이스 메이커가 심장을 자극하기 위해 내는 전기의 양은 극히 적어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한다. 만약 심장이 멈추어야 하는 순간, 즉 죽음의 순간에는 박동기가 자극을 보낸다 하더라도 심장은 뛰지 않는다.
환자의 가족은 트랙위의 마라토너에게 필요한 페이스 메이커다. 환자가 멈출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페이스 메이커는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강요하지 못한다. 멈추려고 할 때에 그들을 다독여 함께 달리고, 멈추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속도를 맞추어 함께 쉬어 줄 뿐이다.
※ 참고 문헌
1) 임연옥 외. (2013). 암 진단 고지에 대한 암 환자의 인식, Asian Oncol Nurs, 13(2) : 59-66
2) Yun YH et al. (1992) Presentation of cancer diagnosis from the patient’s point of view. J Korean Acad Fam Med.13:790-9.
3) 최민수, (2013)“의료행위에 있어 환자의 진료거부와 의사의 설명의무”, 한국의료법학회지, 제21 권: 제1호: 30면
4) Jeon SA, et al. (1996 ) Lee SE, Roh YK. Telling the diagnosis of cancer. J Korean Acad Fam Med.17:445-53
5) Noh HT et al. (1993) Truth telling to cancer patients. Korean J obstet Gynecol.36:6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