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 (24)
‘아이한테 화를 너무 자주 내요. 뒤돌아보면 별거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미워서 나도 모르게 화를 낼 때가 있어요.’
진료실에 들어온 30대 여성 환자의 주 호소는 둘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남편과 남 부러울 것 없는 경제력을 지녔지만, 아들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아 우울증이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혹시나 아들이 정말 유별난지 아니면 자폐와 같은 선천적인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하여 본인의 상황에 대해 더 물어봤다.
‘아이가 크게 유별나진 않은데 자기 아빠를 너무 닮아서 가끔 보고 있으면 남편 생각이 나요. 사실 요즘 들어서 남편과의 관계가 조금 안 좋거든요. 저는 남편의 직장을 위해 제 직장도 그만두고 따라왔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혀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첫째는 말도 잘 듣고 공부도 곧잘 하는데 둘째는 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런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에요… 원래는 둘째도 안 가지려고 했는데 시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서 가져 둘째를 볼 때마다 시어머니의 태도가 생각나요.’
역시나 단순히 아들이 유별나서 미운 것이 아니었다. 아들과의 관계 사이에 남편과의 문제, 시어머니와의 문제, 그때 당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 등이 끼어있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둘째 아들을 볼 때마다 들었고 그때마다 화를 내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던 것이다. 정신과에서 이런 반응을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투사는 내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동을 마치 자신 밖에 있는 다른 것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정신과적으로는 미성숙한 방어 기제로 분류된다. 또 진료받는 환자 중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방어기제이다. 진료실 이외의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늦잠을 자놓고 왜 안 깨워졌냐고 부모한테 화내는 자녀, 투자에 실패하고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는 남편, 본인 시집살이를 생각하며 며느리에게 화내는 시어머니 등 예시는 수없이 많다. 감정의 근원을 내면에서보다 밖에서 찾는 일이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투사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든 감정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면 사람은 금방 미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기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외부 탓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때도 있다. 또 투사라는 방어기제가 나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씌울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할 때 필요한 반응이라는 의견도 있다. 감정적인 반응이 항상 투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 때도 있다.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해서 화가 났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단순히 아이에게만 화가 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투사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반적인 사람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투사는 무의식중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신과의사인 나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보통은 모든 일이 일어나고 되돌아볼 때 투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료를 보러 온 환자들이 자신의 얘기를 하다가 왜 본인이 그때 화를 냈는지 깨닫고 갈 때가 종종 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근원을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투사한다. 하지만 이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무분별하게 쓴다면 내가 원치 않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감정적으로 요동치거나 불편한 느낌이 들 때 그것이 내면에서 기인하는지 외부에서 기인하는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러면 훨씬 더 성숙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