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 (26)
나는 무엇이든 배우기를 좋아한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운동 배우기를 좋아했다. 축구, 농구, 테니스, 스쿼시 등을 배웠는데 딱히 재능이 있는 운동은 없어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중에서 테니스를 좋아해서 집 뒤의 테니스장에서 1년 정도 꾸준 배웠다. 테니스 선생님은 테니스장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 살았는데 아침에 가면 항상 빈 소주병이 있던 기억이 있다. 가끔은 내가 선생님을 깨워야 했다. 그래도 수업은 늘 집중해서 잘 가르쳐주셨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선생님이 1년 동안 다른 자세는 안 가르쳐주고 포핸드 하나만을 가르쳐줬다는 점이다. 기초를 중요시해서 그런지, 그저 다른 자세를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1년 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느 알코올 병원에 입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1년 동안 같은 자세만 가르쳐줘서 굉장히 지겨웠다. 빨리 다른 자세를 배우고 경기를 하고 싶은데 한 자세로만 하려니 답답했다. 그래도 흥미가 있었기에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다. 거의 15년이 지난 후 테니스를 다시 해보고 싶어 레슨을 등록했다. 너무 오래돼서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내 포핸드가 살아있어서 금방 테니스를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선생님은 어떻게 다른 자세는 모르고 포핸드만 잘하는지 신기해했다. 어릴 때 1년 동안이나 같은 자세만 연습했다고 하니 더 놀라워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의 선생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릴 때 배운 것은 오래간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이든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정을 이루는 기초 중 부모의 가치관이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자식들은 좋든 싫든 가족의 규칙을 배우고 가족의 규칙은 부모의 가치관을 토대로 형성된다. 부모의 가치관이 다르거나, 늘 바뀌거나, 명확하지 않거나, 말하는 가치관과 행동이 달라서 가정 내 기초가 흔들린다면 아이는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애착 형성, 자아 형성, 자존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모의 가치관이 달라 가족 내 규칙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부모의 싸움에 아이가 끼어서 고통받는다. 아이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늘 불안해하며 우유부단해지거나 위축된다. 부모의 가치관이 자꾸 바뀌거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 아이는 가치관을 부적절한 곳에서 찾게 된다. 청소년기에는 또래에서 찾기도 하고 온라인상에서 삶의 가치관을 찾는다. 때로는 아무 가치관 없이 본능적으로 살기도 한다. 부모의 가치관과 행동이 다르면 부모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한 가정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들이 같이 참여해서 만든 적절하고 유연한 규칙이 필요하다.
나의 테니스 얘기에 한 가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성인이 돼서 다시 테니스를 배울 때 선생님이 나의 포핸드에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습관이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리해서 자세를 바꾸려고 욕심내다 결국 어깨를 다치고 말았다.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때 심어진 비틀린 가치관은 나이가 들수록 더 어긋난다. 성인이 돼서 그 부분을 고치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때로는 다치기도 한다. 가족 내에서 부모가 어떤 씨앗을 심을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꽃을 피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