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거나 빠르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친구 두 명과 함께 상해를 놀러 갔습니다. 당시 저는 완벽한 계획형 인간이었기 때문에 여행의 모든 순간을 계획해서 다녔습니다. 나머지 친구 두 명은 즉흥형이어서 저에게 모든 계획을 맡겼습니다. 숙소의 위치, 식당의 가격과 종류, 볼거리, 이동수단 등 모든 것을 다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상용화되지 않았을 때라 굉장히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간단히 예약 조회를 할 수 없어 호텔 바우처를 종이로 인쇄해 가야 했고, 지도도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을 적어두거나 표시해 둘 수도 없어 저는 여행 계획을 워드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계획표를 여행 가기 전 친구들에게 확인 보라고 보내줬습니다. 그들이 이메일을 읽지 않았을 것을 대비하여 프린트 해서 비행기에서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의 정성이면 친구들도 저의 계획을 확인해 봤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획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심지어 제가 뽑아준 유인물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여행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친구들과 크게 다퉜습니다. 다툰 이후 고량주를 마시며 화해할 때 그저 그들은 저와 여행을 할 때 저와 즐기는 요소들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여행이란 순간순간 변화무쌍함을 즐기고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이었다면 저에게 여행이란 완벽한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완벽히 수행하는 일종의 임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때보다는 비교적 아량이 넓어진 지금은 두 가지 방법 모두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방법도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앞에서도 살펴봤다시피 우리는 여러 활동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청소에서 행복을 느끼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은 청소에서 극도의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직장에 출근하는 일은 대다수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지는 않지만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처럼 ‘일을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을 잊고 황홀경에 빠져 지금 하는 일에 온통 사로잡힌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 삶 대부분의 순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방법이 더 좋다거나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행복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그저 자신이 느끼는 방식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개인의 선택의 폭을 존중해 주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주의가 정이 없고 각박한 사회로 만들어 불행의 씨앗이 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해 나가는 개인주의가 지켜질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더 강한 한국, 일본,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들은 상당히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행복도가 떨어집니다. 집단주의는 개인의 심리적 자유감을 뺏어가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과도하게 타인을 의식하고, 점점 더 획일화되어 갑니다. 다행히 이런 문화적 결핍 사회에서도 각자가 각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을 풀고 각자만의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시간이 모자라다고 불평합니다. 친구를 만나기에 시간이 없고,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취미활동을 하기에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이뤄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지만 일단 큰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적인 생각에 빠져 직진을 하다 보면 당연히 시간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화성에 지구인을 태워 보내고 싶다던가, 초전도체를 발견하고 싶다던가, 노벨상을 타고 싶다던가 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진정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하는 말이 의미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대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려고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인가요? 물론 우리가 하는 일이 대단치 않다거나 의미가 없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업적을 몇 개 더 쌓는 것이 눈앞의 행복을 놓쳐가면서 이루어야 할 궁극적 목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빨리 달리니까 같이 일단 달리고 보는 것이 정말 옳은 길일까요?
물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디르크 헬빙 교수는 군중이 비상 상황에서 어떻게 비상구로 빠져나가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사람들이 긴급하게 대피할 때 서로 부딪히고 몰리면서 오히려 탈출이 늦어진다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이 현상을 ‘빠른 것이 느린 것(Faster-is-slower)'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끼리 밀치며 비상구로 몰리면 통로가 막혀 탈출이 더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좁은 출구에서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막힘’ 현상이 발생하고, 출구 앞에 아치형으로 사람들이 밀집해 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로 ‘막힘’ 현상이 생깁니다. 특히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좁은 문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서도 빠른 것이 느린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을 위해서는 나만의 속도를 찾아 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가속을 해야 할 때도, 감속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향하는지만 잘 알고 있다면 비록 후에 그 목적지가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나를 추월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마라톤을 즐겨했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러닝을 하다 추월당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른 아침 찰스 강변을 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노라면, 하버드의 신입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에게 점점 추월당한다. (중략).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저도 행복에 맞는 적절한 속도의 범위를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시간과 여러 가지 시행착오 그리고 많은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지금 알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름 쌓인 이 노하우들을 나중에 나의 자식들이 컸을 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글을 써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행복이 각자 다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당신의 노하우도 나에게는 다르게 적용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느껴온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아는 것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몇 명에게라도 저의 이야기가 행복을 찾도록 도움이 된다면 공유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처음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의 세세한 부분들은 저마다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은 할 수는 없겠지만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일들에 대한 대략적인 틀은 비슷한 부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전혀 갈피를 못 잡을 때 저의 노하우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