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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스윗비 Mar 15. 2022

사타구니 면도의 추억

남자 사타구니 면도를 여자가?

인턴 업무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일이 있다. 남자의 시술이나 수술 부위 면도와 소변줄 끼우기, 관장 같은 일은 '의사'가 하고 반대로 환자가 여자일 때는 '간호사'가 한다는 점이다. 아주 옛날 옛적에는 의사는 대부분 남자, 간호사는 대부분 여자이다 보니 그런 규칙이 자연스럽게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내과에서는 심장혈관 시술을 전에 두꺼운 혈관이 지나는 사타구니 근처를 면도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일명 '쉐이빙'이라고 부르는 사타구니 면도는 인턴 의사의 업무였다. 


문제는 환자들이 대부분 40-60대 중년 남성들이라는 점이다. 의식도 명료하고, 환자복만 입었다 뿐이지 겉으로 봤을 때는 그다지 환자 같아 보이지 않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환자복을 벗고 밖에 나가면 다들 부장님 대우받으시며 앉아 계실 분들이다.


이런 분들에게 새파랗게 젊은 여자 의사가 오더니 갑자기 커튼을 슥슥 친 다음

환자분 내일 시술하실 사타구니 부위 면도가 필요합니다.
바지 좀 내려주시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내 소중한 그곳을 지금 저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 앞에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항상 같은 패턴의 질문을 한다.


'남자 선생님 없어요?'

'꼭 해야 해요?'

'제가 하면 안 돼요?'

'보호자가 하면 안 돼요?'


나는 정해진 대답을 기계처럼 반복한다.


'오늘 당직 의사는 저 밖에 없고요, 꼭 의료진이 해 드려야 한다네요. 금방 끝나니까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체념한 표정과 어두운 낯빛으로 바지를 주섬주섬 내린다.

소변줄을 끼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나는 인턴 생활 동안 수많은 남성들의 소중한 곳을 원치 않게 보았고 반대로 여자 소변줄은 껴본 경험은 손에 꼽는다. 이게 무슨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반대로 남자 간호사가 여자 환자를 면도하거나 소변줄을 끼워야 할 때도 서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직까지도 의사, 하면 남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수는 있지만 내가 입학할 때 우리 학년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위아래 학년도 여자가 거의 반은 되었다. 인턴 동기도 거의 절반은 여자였다. 게다가 성에 대한 문제는 점점 민감해져서 여자 환자를 남자 의사가 신체 진찰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반대로 남자 환자에게도 여자 의사는 조심해야 한다. 남자 화장실에 청소 여사님이 불쑥불쑥 들어오시는 것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세상은 점점 달라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런 병원의 후진적인 문화도 개선될 날이 있겠지.

나중에 알아보니 병원마다 쉐이빙을 하지 않는 곳도 있고, 환자에게 시키는 곳도 있다고는 한다.





쉐이빙이 제일 어려워요


첫 쉐이빙 콜을 받고 병동에 갔더니 새 면도날, 장갑, 침대를 보호하기 위한 포 한 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해 준 재료들을 들고 가서 서로 뻘쭘한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면도를 시작했다.


면도날은 손으로 쥐기에 너무 작았고, 부드럽게 면도도 되지 않았다.  진땀을 흘리며 거의 털을 쥐어뜯다시피 하며 힘들게 면도를 했다. 왜 이렇게 면도가 잘 되지 않는 걸까? 그렇게 일주일 동안 쉐이빙은 내게 너무 힘든 일 중 하나가 되었다. 하루는 너무 힘이 들어서 당직실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얘기했다.


난 쉐이빙이 너무 어려워!

왜 이렇게 잘 안되지 쉐이빙이? 너무 오래 걸려! 나만 그렇니?


보통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공감의 반응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소와 다르게 다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쉐이빙은 난감한 일이고 하기 싫은 업무이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닌데라는 표정.


그러다 며칠 후, 다른 병동에서 쉐이빙 준비를 해주었는데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손잡이가 있었다!


오, 여기는 손잡이도 있군, 조금 더 수월하게 면도를 할 수 있겠어.

다른 병동은 왜 진작 내게 이런 손잡이를 주지 않았던 거지?


손잡이에 면도날을 장착하고 보니 엇, 손잡이에 무언가 버튼이 있었다.

이건 뭐지 등골이 서늘해지고 설마... 하며 눌러보니


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면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그렇다, 나는 여태까지 전기면도기의 날만 가지고 면도를 했던 것이다.

당직실로 돌아가 아니 어떻게 여태까지 면도날만 챙겨줬던 거야?!!!라고 격분했더니 모두가 내 얘기에 빵 터졌고 나 혼자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래저래 슬픈 사타구니 면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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