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격차와 건강격차
병원은 바이러스와 세균이 득실 거리는 곳이다.
그 곳을 덴탈 마스크 하나 끼고 돌아다니면서 피, 똥, 오줌 갖가지 것들을 만지고 당직실에서 대충 뒹굴며 자다보면 아무리 젊고 건강한 의사여도 이겨낼 재간이 없다. 게다가 만성적인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더 떨어뜨릴 수 밖에.
결국 인턴 생활 3주만에 목이 붓고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기침이 쉴 새 없이 나기 시작했다.
간만에 콜이 별로 없던 당직날 밤에도 기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억울하고 서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환자인데 지금 누구를 돌본다고 이렇게 집에도 못가고 일하고 있는가 ?
잠 못 자고 밥 못 먹으며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아프니까 더 서러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바쁜 인턴에게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사치인지라 하도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한 결과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했던 업보이기도 하다. 게다가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각종 술기와 처치를 할 때마다 아주 불편한 자세를 유지해야해 다리에 부담이 많이 가게 된다.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얇은 커튼 하나로 서로의 구역이 나뉘는 6인실, 8인실 병실에 가본적이 있는가 ?
솔직히 그 곳은 야전 수용소나 다를바 없다.
침대 간격이 좁아서 지나다닐 때마다 무릎이 침대에 이리저리 부딪히기 일쑤다.
침대와 침대 사이에 심전도 기계 하나 들어 가기 힘들 때도 많다.
밤 늦게 혹은 이른 새벽에 같은 병실 환자가 상태가 안좋아지거나 검사라도 받게 되면 숙면을 취하기도 힘들다. 시끄럽고 정신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장기 입원하면 더 병에 걸릴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반면, 1인실이나 특실은 확실히 다르다.
공간도 넉넉하고, 침대는 높이 조절, 각도 조절이 되고 보호자를 위한 소파나 침대까지 마련되어 있다.
사용료는 거의 호텔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니, 참 돈이 좋구나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장기 입원 환자들은 다인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숨이 다해가는 항암 환자들도 끝까지 다인실에서 힘겹게 있다가 임종 직전에야 1인실로 옮겨지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 앞에서도 결국 모든 것은 자본의 논리 안에서 굴러간다.
안그래도 아파서 서러운데, 돈 없어서 더 서러운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돈 때문에 검사 결과가 나빠야 한다?!
어떤 날은 당직 시간에 특이한 동맥혈 채혈을 하게 된 날이 있었다.
콜을 받고 갔더니 간호사들이 특이한 주문을 했다.
선생님, 이분은 검사 결과가 좀 나빠야 돼요... 차라리 정맥혈이 살짝 섞여도 돼요.
근데 일부러 정맥혈을 섞으라니 ?
아니 그게 맘대로 되나요 ??!!
보통 동맥혈 채혈에는 산소가 풍부하다. 반면 정맥혈은 산소가 적기 때문에 검사 중에 실수로 섞이기라도 하면 검사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고, 재검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부러 정맥혈을 섞어서 채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사연은 이랬다.
곧 퇴원 예정인 폐질환 환자인데, 집에서도 계속 산소치료가 필요했다.
집에서 쓰는 산소는 건강보험 혜택이 없다면 아주 비싸기 때문에 건강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검사 결과상 낮은 산소 포화도가 나와야 했다.
문제는 동맥혈 검사 결과가 너무 나쁘면 상태가 안좋으니 퇴원을 할 수 없고, 결과가 너무 괜찮으면 비급여로 본인이 치료 비용을 모두 지불해야 해서 재정적으로 부담이 크다.
아픈 사람에게만 보험 혜택을 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이분처럼 산소치료가 필요하지만 보험 심사 기준 상 애매한 경계상에 있는 사람이 언제나 문제다.
1차로 채혈했을 때는 기준보다 조금 높게 나와서 실패.
검사 결과를 확인한 병동 간호사들은 환자분과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폴대를 끌고 환자분 손을 잡고 숨이 차도록 일부러 복도를 걷는다.
아직도 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폐가 좋지 않아 빠르게 걷지 못하는 환자분이 힘겹게 발을 움직여 복도를 오가는 모습.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
다시 진행한 2차 시도에서도 기준보다 아슬아슬하게 높게 나와서 실패...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폭풍 같은 당직과 낮시간 업무들을 해치웠다. 그러다 잠깐 여유가 생겨 생각이 나 찾아보니 환자분은 이미 퇴원하여 리스트에서 사라지셨다.
결국 산소치료 보험 혜택 받기에 성공하셨을까 ?
내가 사는 곳이 나의 수명을 결정한다 ? 빈부격차와 건강격차
환자가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병원에서 환자를 거부할 수는 없다. 또 검사를 해보고 치료를 해보면서 호전 되는 것을 봐야하기 때문에, 입원할 때부터 비용을 미리 정확하게 알기도 어렵다.
특히 수술 혹은 시술 후 정해진 스케줄대로 퇴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자 상태에 따라 재원기간이 들쑥날쑥한 내과적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막상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재산이 없고 어려운 사람들도 사회사업팀이든 어디에서든 도움을 받고 어떻게든 병원비를 처리하고 나가게 된다. 아주 간혹 야반도주하는 노숙인을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병원에 오기까지.
돈이 무서워서 병원에 오지 않는다거나, 참다 참다 응급실에 오기는 했는데 돈 때문에 치료를 받길 거부하고 퇴원해 버리는 경우도 곧잘 보게 된다. 입원한 이후에도 돈 때문에 많은 선택들이 달라지고, 그것들은 환자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이 건강격차라는 것일까. 빈부격차와 건강격차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에서 런던 지하철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동쪽으로 한 정거장씩 멀어질수록 수명이 1년씩 단축되었다는 결과도 있다.
우리 나라로 따지면 강남에서 몇 km씩 멀어질수록 평균 수명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격차가 줄어들 수 있을까 ?
이미 의료 접근성은 최상인 우리 나라에서도, 돈 때문에 건강을 잃는 사람들이 없으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병원에서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큰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