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만큼 자라는 이상한 존재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

by 닥터스윗비

퇴근 후 저녁시간.

아이 어린이집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씻으려는데 이런, 빨대가 찢어져 있었다. 구멍이 나거나 너덜너덜해진 것도 아니고, 아예 잘려 있었다.

아이가 빨대를 제대로 물어 뜯은 모양이다.


이거 누가 물어 뜯은거야~?
별이가! 재밌어서~


대답하면서 멋쩍은 듯 웃는 아이를 보니 나도 웃음만 나온다.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변명처럼 먼저 말할 줄도 알고.

음식도 잘 못 베어 먹어서 작게 잘라줘야 했는데 이제는 빨대를 절단할 정도라니, 언제 이렇게 큰거지?


절단 나 버린 빨대 끝...


찢어진 빨대를 보고 있자니, 빨대를 못 써서 숟가락으로 물을 떠먹여줘야 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는 힘이 약해 재활의학과 진료도 봤었고, 젖병도 힘들게 물렸던 아이.

빨대컵 사용도 한참 늦게 성공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는 여러모로 느렸다.

18개월까지 걷지 못하다 19개월이 되고 나서야 겨우 서툴게 걷기 시작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했던 이력이 있던지라 대학병원 교수님은 16개월까지 못 걸으면 한 번 와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버티고 기다리다보니 혼자 걸었다.


걷는 것 뿐 아니라 말도 느렸다. 30개월 전까지 엄마, 아빠 외에 제대로 말하는 단어도 거의 없었다. 또래들은 이미 두 단어를 붙여서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지 오래.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아이도 자기 마음을 표현을 못하니 답답해하고 힘들어하기도 했다.

30개월까지만 기다려보자, 생각은 했지만 아이의 말이 느린 것이 혹여 내가 일을 하는 탓일까 맘이 괴롭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에게 스트레스는 주지 않으면서 다양한 언어 자극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맘을 썼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딱 30개월이 되자마자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조금씩 말에 재미를 들린 아이.

갑자기 아침을 먹다 말고 책을 가져온다.

글자를 가리키며 '이거 뭐야? 읽어주세요' 한다.


설마... 한글 배우려는거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출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책을 읽어준다.

글밥이 많아 읽느라 목이 메었지만 기뻤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대로 자란다.

언젠가는 모두 다 해낼 일이다.

그걸 못 기다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조바심 뿐이다.


아이가 느리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부모가 좋은 환경과 적절한 자극을 주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결국 아이들 스스로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육아서의 고전 중의 고전인, 박혜란 선생님의 글이 생각난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특수하게, 부모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튼튼한 존재로 태어난다.
부모들이 섣불리 끼어들지만 않으면 그들은 얼마든지 싱싱하게 커 갈 수 있다.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라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박혜란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사람.

나보다 나를 더 믿는 사람.

아이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주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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