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브리더스 Brothers> (Aslaug Holm, 2015)
관심 셋,
#엄마 #시간의 기록 #성장
나에게 자식이란 온전히 부모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정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보다 개인적 정의로써 나에게 어머니란 서로가 본인의 목숨을 스스로 인질 삼아 상대방의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게 하는 그런 존재,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범죄자 이다.
당신은 도대체 나에게 뭘까
나는 도대체 당신에게 뭘까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불효막심하고도 복에 겨운 자식의 관점에서, 부모와 자식 간 관계의 비극은 부모가 자신보다 자식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애증의 관계라는 것,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이 비극적 관계 속 타자인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음과도 같은 것은 결코 놀라울 일이 아니다.
“너도 사랑 지상주의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그런건 또 누구한테 배웠니?”
“사랑한테 배웠지. 어떤 한 여자를 미치게 사랑하거든. 그녀 이름은, 엄마."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2014)" 中
당신은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엄마가 늘 베푼 사랑이 어색”하고, 이로 인해 늘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자식이 비단 오혁과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랑 속에서 18살에서 19살이 되던 해부터 23살이 되던 해까지, 나와 당신은 미친 듯한 전쟁을 이어갔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우리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틀어져만 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우리가, 왜 피를 뚝 뚝 흘리며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서로를 찌르고 있는지. 왜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만 있는지.
우리의 전쟁은 내 23살 때에 막을 내렸다. 처음으로 당신과 약 7개월의 시간을 떨어져 살았던 때였다. 사랑에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의 의미를 그렇게 처음 배웠다.
한 번도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나의 어린 시절, 모든 것이 행복했던 우리의 소중한 때의 향수를 어떻게든 영원히 현재로 보존하고, 또 되풀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일치에서 불일치로 바뀌기 시작할 그 때, 우리는 차마 그 믿음을 스스로 놓아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 그 믿음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내가 가장 아끼는 감독 중 하나인 리처드링클레이터. 그의 작품 <Boyhood>의 후반부에서는 독립을 해 떠나가는 아이 뒤로 주인공 어머니는 혼자 처량하게 남아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그의 아들에게 그가 떠나가는 것을 예상은 했지만, 이 뒤에 그녀의 인생 속 무엇이 더 남아 있을 줄 알았다고 절규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가 주인공 아이 앞에 놓인 광활한 풍경을 떠올릴 때, 당신은 주인공 엄마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내게 “엄마가 너무 안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그렇게 쓸쓸히 혼자 둘 리 없었으니까.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제는 우리의 각기 다른 세계를 서로 존중해주어야만 해” 라며 나는 독립이라는 말을 당신에게 꺼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만든 그 처량한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 싫어 더 크게 외쳤다. 당신의 인생은 ‘어머니’가 전부가 아니라고. 당신에겐 온전히 당신일 권리가 있고, 이제 제발 내가 아닌 당신의 행복을 바라달라고.
끝내야 해요, 충분히 찍었잖아요.
내가 엄마에게 독립을 선언하듯, 그리고 <Boyhood>의 아들이 짐을 싸고 떠나가듯, <Brothers> 속 큰 아들은 엄마의 눈을 보며 말한다. "끝내야 해요. 충분히 찍었잖아요."
그리고 이 한 마디와 함께 다큐멘터리 <Brothers>는 끝을 향해 나아간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이자 엄마인 Asluag는, 지금껏 끝내지 못했던 영화를 끝마치고자 다음과 같은 독백을 이어간다.
"왜 나는 10년 가까이 될 때까지 이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했을까?
그건 아마도 이 촬영이 끝나면 한 시절이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너희가 떠나는 거겠지."
영화 "Brothers (Aslaug Holm, 2015)" 中
“그냥 평생 엄마랑 살자”
장난스럽게 말하던 당신의 지난 말을 떠올린다. 가끔은 정말 엄마의 품에서 마냥 어린 아이로 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아니 한다. 하지만 점점 불행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세계를 서로의 영역으로 남기고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아 한다고. 그리고 이것은 <Boyhood> 속 엄마처럼 당신의 인생이 끝나는 것도, 혼자 쓸쓸히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라고. 서로의 세계를 존중해주며 당신은 당신의 온전한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린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새로운 희망과 확신을 품었었다.
하지만 영화 속 엄마(Asluag)의 독백은 이러한 나의 확신을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노라는 깨달음으로 기어이 바꾸어 놓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우리의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나의 행복과 함께 상대방의 행복이나 빌어주는' 정도의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내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과 존재와 기억과 시절이 자식의 그것들과 뒤얽혀 그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한 명의 어머니인 그녀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만이 담을 수 있다.
영화 <Boyhood>는 감독이 그러하듯 철저히 어머니가 될 일이 없는 한 아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성장 영화다. 아들의 눈에는 그저 자신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어머니, 자신의 미래가 이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놓여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시선이 담긴 9년의 기록, <Brothers> 속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어머니라는 사람의 시선과 그 속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근처에라도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여자감독이 많아져야 한다는, 얼핏 보기에 이 글의 전반적인 내용과 벗어난 주제인 것 같은 이것을 그녀의 시선과 함께 담기는 이야기들을 보며 느꼈던 이유다.
나는 다큐멘터리의 의의가 '시간의 기록'이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의 자연의 변화를 동반하는 물리적 시간의 기록. 하지만 영화 <Boyhood>의 혁명적인 촬영 방식은 이러한 나의 다큐멘터리 존재 의의에 의문점을 던져 주었다. 그의 비포 시리즈와 <Boyhood>처럼 픽션 또한 실재하는 시간의 물리적 경과를 담아낼 수 있고 그것이 주는 감동을 구현해낼 수 있다면, 동일한 것을 전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는 이것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강점을 갖는가? 다큐멘터리 또한 드라마처럼 감독의 '연출'이 들어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 연출이 드라마의 연출과는 무엇이 다른가?
다큐멘터리 <Brothers>는 영화 <Boyhood>의 다큐멘터리 버전으로 불리곤 한다. 때문에 <Brothers>를 보며 위 질문들에 대한 개인적인 답변을 내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내린 답변은 바로
비예측성
이다.
(*아래의 내용에는 꽤 비중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엄마가 해주고싶었던 이야기들" 부터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영화 <Boyhood>는 물리적 시간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서 감독이 짜 놓은 흐름대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경우, 여전히 감독의 연출이 주가 되긴 하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는 세상은 감독이 창조해 낸 세상이 아니다. 때문에 감독은 예측을 할 뿐, 실제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감독의 손을 떠나 살아 움직인다.
역시 다큐멘터리 <Brothers> 안에서는 감독인 엄마의 예상과는 빛나간 두 아들의 행동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 자식의 행동보다 더 비예측적인 것들이 존재하겠는가..?) 바로 이 비예측성에서 영화 <Boyhood>와의 차이점이 극명히 드러났는데,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타 장르와 견주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상상력과 연출로는 절대 불가능한 사건들이 감독의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연출 불가능한 사건들은 또 다른 연출의 가능성을 여러준다.
예로, 그녀의 둘째 아들은 형과는 달리 어릴적 축구를 무척 싫어하는 아이였다. 감독은 그녀의 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그의 향상된 축구 실력을 통해 연출하는데, 이러한 연출은 곧바로 똑같은 그의 공차기에서 비롯된 '유리창 깨기'라는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예측치 못했던 사건은 곧바로 또 다른 성장, '책임감'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의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예측성'이 인간 생의 가장 뚜렷한 특성과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다큐멘터리의 세계에대해 또 하나를 배운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인간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장르구나. 라고.
이러한 비예측성이 난무하는 세계 속 두 주인공 아들의 관찰자 Aslaug 감독은, 물론 이 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한 명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9년간 두 아들의 성장 과정을 담으며 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못하겠어”
"숙제는 원래 어려워, 내 숙제도 그래
(그렇지 않아)
형한텐 어떨지 몰라도 난 어려워"
영화 속 엄마이자 감독인 Aslaug는 두 아들의 "못하겠어"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곱하기, 작문 숙제 등 두 아들이 처음으로 마주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담으며 엄마는 “힘들 때마다 이렇게 도망칠 순 없어” 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른 뒤 엄마는 두 아들에게 말한다. 자유에는 책임과 판단력이 요구된다고.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용기"
엄마가 9년 동안의 두 아들들의 모습을 담으며,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 "용기"라는 두 단어가 아니였을까.
* [다큐저니] 관심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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