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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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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Nov 17. 2015

여전히 나를 달리게 하는 것들

 열 번째 단축 마라톤이 내게 남긴 것

10Km 단축 마라톤을 처음 접한 건 2013년 초여름이었다. 회사 동료와 재미 삼아 참가했다. 완주는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았다. 당시만 해도 아직 20대(후반..)였고, 잦은 야근과 간식으로 몸이 불기 전이었다. 1시간 이내에 골인했고, 결승선이 주는 쾌감을 맛봤다. 이때부터 어제까지 총 10번의 단축 마라톤에 참가했다. 내세울만한 기록은 없지만, 111Km를 달렸다.


처음에는


나를 꾸준히 대회에 나가게 한 동인은 결승선에 있었다. 첫 대회에서 맛본 결승선의 쾌감이 워낙 강렬했다. 결승선 바닥에 깔린 기록 측정 매트를 꾹 밟으며(삐- 소리가 난다), 고통스러운 걸음을 '탁' 놓는 그 순간이 나를 계속 대회로 이끌었다. 기록 욕심도 한 몫했다. 더 빨리 골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덕분에 한동안은 달리면서 기록만 생각했다. 참가자가 몰리는 10Km 코스 초반, 뭉쳐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앞지르기 바빴다. 코스 중반엔 손목에 찬 스톱워치를 닳도록 들여다봤다. 쫓기듯 달렸고, 남는 건 내세울 것 없는 기록과, 완주 메달뿐이었다.



마주오는 얼굴들


'그쯤 했으면 이제 하프에 도전해보라'는 권유를 뒤로하고, 나는 계속 10Km 코스에 등록했다. 40분대 기록을 달성한 후 하프로 넘어가고 싶었다. 물론 그런 기록은 달성하지 못했다.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고, 체중도 감량하지 못했다. 그저 의욕을 불태우며 대회에만 주기적으로 나갔다.


기록은 늘 제자리를 맴돌았지만, 달리는 동안의 마음은 점차 편안해졌다. '이래가지고는 이미 틀렸군' 같은 감이 생겼는데, 같은 거리를 여러 번 달리면서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숫자에 조금 덜 조급해하면서부터, 반환점을 돌아 마주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주오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생기 넘치는 20대 남녀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허덕이는 뱃살 회사원, 근육질 미군들, 유모차를 밀고 달리는 결연한 아버지, 흐트러짐 없는 중년의 동호회원들, 묵묵히 달리는 지긋한 어르신까지. 괴로운 표정들은  한결같았지만, 묘하게 다른 아우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동질감


어제는 처음으로 하프 코스에 도전했다. 21Km. 그동안 참가했던 코스의 두배가 조금 넘는 거리다. 당장 완주가 걱정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스톱워치도 풀어두고 초반부터 걷듯이 달렸다. 앞에 길이 열려도 오버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속으로 '천천히'를 되뇌었다.


한바탕 비가 내린 상암동 평화공원은 아름다웠다. 한강길로 빠져나가면서는 강 위로 내리깔린 물안개 냄새가 기분 좋게 비릿했다. "아 오늘 코스 좋네요" "어르신 대단하시네요" "아빠 잘 따라와" 지척에서 비슷한 페이스로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같은 고행을 시작했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비슷한 속도로 달린다는 동질감이 있었다. 힘이 났다. 처음 달리는 긴 거리가 주는 두려움이 많이 가셨다.


밀고 당기는 사람들


15Km 구간을 지나 코스가 종반으로 넘어가면서, 무리를 이루던 사람들이 실력차에 따라 흩어졌다. 물론 나는 후미로 쳐졌다. 무릎에 문제가 생겨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내 앞 뒤로 드문 드문 보이는 사람들 역시 후미에서 힘겹게 레이스를 이어가는 이들이었다.


통증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쯤, 맞은편에서 내가 이미 지나온 반환점을 향해 한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장애로 왼쪽 다리를 절며 달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땀 줄기가 앙다문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느릴지언정 완주를 포기하지 않는 깡마른 아가씨, 어머님, 미군(의외였다)과도 스쳤다. 나는 그들에게 심적으로 의지했다. 그들은 끝까지 나를 밀고 당겼다.


2시간 28분 만에 결승선에 들어왔다.



아직까지 나는


러너들은(나는 조거도 아니요, 그저 비기너다) 마라톤을 외로운 레이스라고 말한다. 실제로 풀코스나 울트라마라톤을 마치는 순간 간신히 참아온 외로움에 복받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진지한 자세로 달리기에 임하는 이들에게 달리는 일은 그런 의미고, 어쩌면 그게 달리기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작 하프 코스를 한 번 달려봤을 뿐이지만, 아직까지 나는 긴 시간 달리는 일이 외롭지는 않다. 옆에서 누군가와 같이 달리는 레이스 초반의 짧은 순간, 멀찍이 떨어져 힘겹게 달리는 레이스 종반의 순간에, 그들에게 의지하고, 그들에게서 완주나 삶의 의지를 엿보는 일이 나를 외롭지 않게 한다. 나를 여전히 달리고 싶게 만든다.



앞으로도 계속,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싶다. 가능하면 조금 더 진지한 자세로 풀코스까지 달려봤으면 한다. 누군가 어때요? 재미있어요? 물어본다면 정말 그렇다고, 볕 좋은 봄이나 가을에 꼭 한 번 같이 달려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을 하자고 먼지 같은 나의 달리기 역사를 읊어댔다. 부끄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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