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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씹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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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May 12. 2016

나의 유일한, 그의 유일한

나의 6년 지기 이종(異種) 친구에 대하여

축제 주간. 학보사 기자들에겐 곧 '집에 갈 수 없는 주간'의 다른 말이었다. 무슨 행사가 열렸고, 규모는 어땠다는 시시콜콜한 기사들로 채워졌지만, 축제 특집호는 종갓집 차례상처럼 빼먹으면 큰 일 나는 전통이었다. 축제로 시끌벅적하던 2010년 5월, 운동장에 차려진 학과 주점들의 불이 다 꺼지도록 나는 학보사 사무실에 홀로 남아 기사를 썼다.


마감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사실 이 날 밤은 낭만적이었다. 남몰래 좋아하던 학보사 동료에게 '얌전히 잠만 잘 테니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장난 섞인 부탁을 건넸고, 상상도 못한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온 밤이었다. 기사가 써질 턱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가빴다. 자정도 안 된 시간에 찾아가기는 머쓱하고 쑥스러워, 써지지도 않는 기사 앞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 날 새벽 나는 고백을 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나는 바닥에 나란히 누운 채로 마음을 전했다. 긴장과 설렘이 한 칸 방에 가득했다. 듣는 이 하나 없었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히도 나눴다. 언제부터였는지, 당신이 왜 좋은지. 그러다 그녀가 먼저, 그리고 한 참 후에 내가 잠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떠야만 했다.




사실, 이 날 고백의 순간은 우리 둘만이 오롯이 공유한 건 아니었다. 증인이자 훼방꾼 같은 존재가 방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이름은 '나나'. 나나는 길에서 구출돼 그녀에게 입양된, 수컷 청소년 고양이였다. 혈기 왕성한 나이였던 그는, 이 날 새벽 작은 방 안을 우악스럽게, 매우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이따금씩은 누운 내 몸 위를 뛰어넘기도 했다.


무서웠다. 반려동물을 키워 본 경험이 없는, 더구나 고양이는 만져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캄캄한 새벽 내 몸을 사자처럼 뛰어넘는 존재가 공포 그 자체였다. 결국 덜덜 떨며 일어난 나는 그녀에게 "안 되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도망쳤다. 근처 선배의 집으로, 반쯤 얼이 빠져 새벽의 텅 빈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마음을 고백한 밤, 사람이 아닌 존재와 함께 보낸 낯선 밤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좀처럼


그녀와 나는 여전히 연애 중이다. 동시에 고양이 나나와도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며 햇수로 6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에 나나와 나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애초부터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그는, 내 손가락을 깨물기 일쑤였다. 여자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나를 향해 꼬리를 부풀리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주 조우했다. 여자친구가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내가 들러 나나의 밥이며 화장실을 살폈다. 그는 차가웠다. 1시간 반을 달려와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간식을 까주는 내 손등도 할퀴었다. 한 번은 열어둔 현관으로 그가 탈출해, 빌라 전체를 맨발로 뒤지고 다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손을 내어줄수록


나나는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물을 틀고 수도꼭지 아래 손을 오므려 받치면, 세면대로 껑충 뛰어올라 물을 핥아 마신다. 처음 나나에게 손을 받쳐준 날을 기억한다. 까끌까끌한 혀가 내 손바닥에 닿았고, 그때만큼은 온순해서 물을 마시는 그의 뒤통수를 노는 손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교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물을 다 마시면 다시 홀대가 시작되곤 했다.



수도꼭지 밑에 손을 받쳐주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를 향한 나나의 하악질 횟수가 줄어들었다. 내게서 나는 냄새를, 내 얼굴을,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둘이 남겨지는 순간에도 이전보다 덜 경계했고, 가끔은 다가와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나 역시 나나의 울음소리를 기억했고, 귀의 접힌 각도로 기분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확실히 전보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동거


2년 전 여름, 나나와 나는 그야말로 덩그러니 둘 만 남겨졌다. 여자친구가 마땅한 탁묘처를 구하지 못한 채 일주일간 고향에 내려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나를 내가 사는 집에 데려오게 됐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를, 게다가 성인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나나를 40Km나 떨어진 내 집에 데려오는 일은 모험이었다.



이동장에 넣은 나나를 내 차에 태워오는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어찌나 울어대던지, 종국에는 목이 다 쉬었다. 집에 도착한 뒤로는 식음을 전폐했다. 그 좋아하는 수박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룻밤이 지나고 적응을 하는 듯하던 나나가 새벽 내내 방 문 앞에서 울어대기 시작했다. 잠시 나와 달래 주면 그때뿐이었다. 이틀 밤을 꼬박 설치고, 결국 털 문제로 출입을 금했던 내 방 문을 열어줬다.


나나는 잽싸게 침대 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넣어 어르고 달래 봤지만, 솜뭉치 같은 손으로 내 손을 탁 치고는 구석으로 구석으로 들어갔다. 달래기를 포기하고 잠든 새벽, 발에 느껴지는 온기에 잠에서 깼다. 나나가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발목을 배게 삼아 자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퇴근한 아버지들에게서나 날 법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침까지 얌전히 발목을 내어줬다. 그리고 그가 며칠 사이 느꼈을 불안에 대해 생각했다. 일주일간 어떻게든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내 옆에서 그르렁그르렁 숨 쉬고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방 문을 꼭꼭 닫아둬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데서 드는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발목에서 올라오는 그의 체온과 뒤섞였다. 나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는 나의 유일한


요즘의 나나는, 내가 벌렁 누워있으면 두 손을 내 다리 위에 척 올리고 낮잠을 즐긴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내어달라 야옹야옹 나를 부른다. 불쑥 찾아가도 놀라지 않고 초연한 얼굴이다. 나 역시 다리에 올려진 그의 두 손이 익숙하다. 누워있는 내 주변을 그가 어슬렁거리면, 다리 한쪽을 옆으로 치워 공간을 내어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리만 듣고 세면대로 간다. 눈 앞에 불쑥 나나의 코가 나타나도 초연하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나나의 주인이나 보호자가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집사'가 아니다. 여자친구를 매개로 수년전에 알게 된 사이. 퍽 정이 들었고, 그래서 보면 서로 반갑고, 성격부터 식성이나 취향 같은 라이프 스타일까지 속속들이 잘 알게 된 사이다. 처음엔 여자친구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둘만 공유하는 추억이 많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의 감정도 읽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나와 나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친구' 말고는 다른 관계의 정의가 떠오르지 않는다. 생물학적 종(種)이 다르긴 하지만, 내 오랜 친구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나나에게 느끼는 감정에 근본적인 큰 차이는 없다. 우리는 함께보낸 6년이라는 시간을 디딤돌 삼아, 기쁘고 슬프고 아픈일들에 공감할 수 있고, 서로의 기분을 살피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


나로서는 그가 유일한 종이 다른 친구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에게도 내가 유일한 이종 친구일 것 같다. 내가 오랜 벗들에게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나와도 지근거리에서, 가능한 오래도록 시간과 감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몸이 아픈 이 친구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오래도록 머물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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