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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May 16. 2016

일, 피할 수 없는 61%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일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선택은 늘 어렵다.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선택 역시 더 어렵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선택이라는 것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선택을 의미한다. 돈에 관한 선택이 그렇다. 천 원짜리 물건을 구매할 때와, 만 원짜리 물건을 구매할 때, 십만 원짜리 물건을 구매할 때의 고민은 그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에 관한 선택도 그렇다. 1시간 계획과 하루 계획, 한 달 계획에 들이는 공은 분명 그 양과 결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일(work)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은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은 우리 스스로를 부양하는데 필요한 돈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결정한다. 만나는 사람들과 사회적인 영향력, 인식 혹은 편견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으로 일은, 자존감이나 사고 같은 내적 영역과 미래의 시간에까지 깊숙이 관여한다.


완전하게 고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온갖 직업 중에서 취향과 필요에 꼭 맞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일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은 차고 넘치고, 흔히들 말하는 '보편적으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라도 최대한 현명하게 골라야 한다. 사람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이 다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다. 일은 우리의 내면, 지금, 미래의 시간을 좌우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우리는 시간을 들여 많은 것들을 고려한다. 나의 필요, 제품의 성분, 유통기한, 가격을 따져보고 물건을 선택한다. 이때에 좋은 선택은 나의 필요에 제품이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조금 더 비싸고 덩어리가 큰, 이를테면 집이나 자동차 같은 소비를 하는 상황이라면 좋은 선택을 위한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다. 선택하려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다.


Millet, Des Glaneuses, 1857, 83.5x111cm, Huile sur toile


고민을 해도 해도 어려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각자가 필요와 취향에 따라 일의 본질을 정의 내리는 과정을 통해 조금은 수월하게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내려진 일의 정의는 직업이나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순간에, 어느 정도 딱딱 떨어지는 판단 기준으로 쓸 수 있다. 우선 사전에서 찾아본 '일'의 정의는 이렇다.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직업에 대한 고민이 깊은 요즘, 스스로 내려 본 일의 정의는 조금 장황하다.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한다.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하다 하더라도(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 일은 피할 수 없다. 다만, 그 성격이 밥벌이에서 자아실현이나 명예로 달라질 뿐이다. 때문에 일의 숙명은, 수저의 종류와는 무관하다.


61%


나는 보통 9시간을 일한다. 드물긴 하지만 17시간을 회사에서 보낸 적도 있다. 오가고 먹는 부가적인 시간까지 고려하면 하루 평균 11시간 정도를 일하는 데 할애한다. 깨어있는 시간을 18시간으로 잡으면, 하루의 61%가량을 일하는데 쓰고 있다. 사람마다 체감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게 61%는 '대부분'으로 표현하기에 충분한 수치다. 삶의 대부분을 일을 하는데 할애하고 있고, 앞 선 정의에 적었듯 이건 불가피하다.



때문에 나는 일과 그 이외 시간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일은 생존의 수단으로 삼고, 그 과실을 늦은 밤이나 주말에 즐기는 식의 삶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피할 수 없는 일의 비중이 너무 크다. 일 그 자체가 행복의 일부여야 한다. 그러자면 일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인 대가 역시 중요하지만, 그 대가의 크기는 일을 선택하는데 우선적일 수 없다.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을 향한


우리가 하는 모든 종류의 일은 타인과 관련돼 있다. 타인을 치료하거나 변호하는 전문적인 일뿐만 아니라, 물건을 만들고, 글을 짓는 일 모두 타인을 향해 있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타인에게 좋고 나쁜 영향을 끼친다. 건강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과, 몹쓸 재료로 불량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경우 모두 여기에 속한다.


때문에 나의 일은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매 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내 일의 결과가 가급적 많은 타인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 나의 일이 타인의 손해나 아픔, 슬픔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정의는 '왜 사냐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는 물음에 대한 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가피하게 평생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면, 역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좋다.


경험과 영감


긴 시간을 할애하는 만큼,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이 발생한다. 이런 경험은 다음, 그다음의 뜻하지 않았던 기회와 영감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고 새로운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든 종류의 일에서 이 같은 경험이 발생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반복적이고 편안한 작업보다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작업이 경험과 기회의 측면에서 더 잠재력 있고, 지속 가능하다. 당장의 편의는 좋은 선택 기준이 될 수 없다.




몇 가지 현실적인 내용들이 더 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손에 꼽는 정의는 이 정도로 정리된다. 내가 생각하는 일이라는 행위의 의미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모습이며, 동시에 지금의 내 가장 큰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 뜻에 꼭 잘 맞는 일을 하고 있는지 슬쩍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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