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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Nov 19. 2021

(소설) 꼬뮤니까시옹

프롤로그

프롤로그



25년 전.


경기도 고양 어디쯤이었다. 2층 단독 주택. 마당이 있고, 잘 손질된 잔디가 있고, 공기가 깨끗하고, 실내에서 보이는 북한산이 예뻤다. 그곳에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가 살았다. 여자는 20대 후반, 아이는 6살 여자아이. 단 둘이 살기엔 허전하고 관리가 힘들 만큼 넓었다. 그래서 아이가 이모라 부르는 가사 도우미가 상주했고 젊은 여자를 위한 개인 간호사가 있었다. 누구보다 종로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경제 문제를 해결해주는 50대 중반 남자가 있었다. 그랬기에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찾기 힘들었고 생기가 돌았다.


밤. 시곗바늘이 9시 30분을 만들어 낼 때, 6살 여자아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 인형놀이를 했다. 바비의 긴 머리카락을 켄 목에 감고 주문을 외웠다. 아이는 가끔 틀어놓은 TV 화면을 힐끔거렸다. 이 집 가구 대부분이 직선과 금속의 요소를 갖추었다. TV만은 테두리가 둥글둥글한 것이 오래전 모델을 닮았다. 유명 디자이너의 레트로 풍 제품. 모서리가 부드러운 TV 화면 내보내는 영상은 '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즈의 동명소설을 1960년에 영화 만들었다. 영상도 바랬고 특수 효과도 학예회 수준이지만 클래식한 TV 수상기와 잘 어울렸다.


사이렌이 울리자 일로이들이 최면에 걸린다. 그렇게 지하세계 입구까지 멍청하게 걸어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주인공. 그새 사랑에 빠진 한 일로이 여성을 구하기 위해 지하세계로 따라 들어간다. 지하세계 곳곳에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바닥에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가 널브러져 있다. 영화에서 미래 인류는 지상, 지하의 두 종족으로 나뉜다. 밝은 지상 세계에 사는 늘씬한 금발 일로이들과 어두침침한 지하 세계에 사는 초록색 땅딸보 멀록들. 가끔씩 멀록들이 일로이들에게 최면을 걸고 지하세계로 불러들여 양식으로 삼는다. 흉측한 멀록이 우아한 일로이를 사육하는 세상이 인류의 미래라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종착역, 지하세계에 도착한 일로이들이 그제야 최면에서 깨어나 비명을 질렀다.


여자아이 눈은 언제부턴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세탁실에서 달려온 가사도우미가 TV를 껐다.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였다.

“나오미, 이제 자야지.”

입 아래 도드라진 점이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이모, 조금만 더 보면 안 돼요?”

“이젠 자야 할 시간이지요?”

“네.”

나오미는 아쉬워하면서도 인자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에 순순히 따랐다.

 

“쓸 돈은 충분하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만 끊을게요. 나오미 재워야 해요.”

그때까지 거실과 붙은 주방에서 통화를 하던 젊은 여자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기침이 시작되었다. 하얀 스프레이를 든 간호사가 달려왔다. 여자는 손사래를 쳤다. 한 동안 계속되던 기침이 잦아들었다. 여자는 거실로 향했다. 걸을 때 나풀거리는 치마 사이로 종아리 윗부분이 보였다. 말랐지만 아름다웠다. 나오미는 가사도우미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젊은 여자 기침이 다시 시작되었다. 간호사가 이번엔 소파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사래만 쳤다. 다행히 기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자는 잠깐 숨을 고르고 나오미 얼굴을 자신 품으로 당겼다.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재워줄게.”

가사도우미가 우려의 눈빛으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나오미 손을 잡고 천천히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간호사와 가사도우미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엄마는 나오미가 누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나오미는 반쯤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간호사와 가사도우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말없이 나오미를 바라보았다. 머리맡 전등에서 내려오는 노란 물결의 빛이 딸아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매끈하고 부드럽게, 초록 눈과 어우러지는 곳에서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만나 함께 흘렀다. 딸의 모든 부분이 사랑스러웠다.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가슴이 흥분으로 들뜨고 있었지만 기침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책을 읽어줄까?”

“엄마는 책 못 읽잖아.”

나오미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나오미가 원하면 읽어줄 수 있어!”

“그냥 엄마 얼굴만 보고 있을래.”

엄마는 북받치는 가슴이 터질 듯, 찡그림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딸아이와 젊은 엄마, 두 사람 모두 눈 밑이 도톰해졌다. 노란 불빛을 받은 그 부위가 반짝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이 서로의 몸을 데웠다.

“엄마, 무슨 생각해?”

“우리 나오미 생각하지.”

“다른 생각하고 있잖아, 난 다 알아.”

“엄마가 무슨 생각하는데?”

이번엔 엄마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미안, 잘 몰라!”

“요 거짓말쟁이, 다 안다고 했잖아, 요, 요, 요, 귀여운 거짓말쟁이.”

나오미가 가냘픈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과 눈빛이 서로의 몸을 넘어 주변 공기까지 데우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계절은 바뀌고 있었고 곧 다가올 차가운 무엇까지 데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데우기에 젊은 엄마는 약했고 딸아이는 무능했다.

“엄마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면 좋겠어. 엄마가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아빠를 혼내줄 수도 있잖아.”

다시 눈이 동그래진 엄마가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딸에게 말했다.

“나오미! 아빠는 좋은 분이란다. 아빠를 혼낼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나쁘다고 했어.”

“너무 늦었으니 그만 자야지, 우리 귀여운 아가”

“아가 아니고 공주님이거든!”

“그래, 우리 예쁜 나오미 공주!”

“엄마도 잘 자!”

“그래.”

전등을 끄자 노란빛으로 빛나던 딸아이 얼굴이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푸른빛을 띤 아이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 윤곽은 여전히 대리석처럼 매끄러웠다.

“엄마?”

방을 나서는 엄마를 딸아이 목소리가 붙들었다.

“응?”

“왜 마음은 볼 수 없어?”

“창피하지 않을까? 누가 내 마음을 엿본다면 말이야. 가끔씩은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감추고 싶을 때도 있는 거란다.”

엄마 얼굴에 수줍은 사춘기 소녀 미소가 나타났다.

“엄마가 아빠 사진 몰래 보는 것처럼?”

그날 밤, 아이는 엄마를 여러 번 당혹스럽게 했다.

“나는 커서 사람들의 마을을 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들 거야. 그럼 사람들이 엄마, 아빠처럼 서로를 몰라주는 일이 없을 거잖아.”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그래, 서로의 마음을 안다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거야, 꼭 그런 기계를 만들어 보렴.”

젊은 엄마는 숨 죽이며 나직이 말했다. 푸른 어둠 속에 빛나는 딸아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방문을 조금 열어 두고 방을 나갔다.

“엄마, 아프지 마.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 간호사 언니와 나누는 가냘프고 조용한 목소리, 잔기침 소리를 들으며 나오미는 혼잣말했다. 가을이 짙어지고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부드러운 엄마, 착한 아이는 완벽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비록 자상한 아빠는 곁에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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