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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Jan 25.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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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오후 5시쯤 동희는 성 프란시스 병원으로 갔다. 희권이 입원 중인 드림캐리어 연구원을 만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 것이다. 생각만큼 쉽지 않은지, 희권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동희가 기다리는 병원 휴게실로 왔다.

“오래 기다렸지? 따라와.”

희권이 동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음료가 반쯤 찬 종이컵들이 있고, 어지럽게 쌓인 서류들이 있었다. 작은 옷장을 열고 의사 가운을 꺼냈다.

“이거 입어.” 희권이 하얀 가운을 내밀었다.

“괜찮아, 빨리 입어.”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희에게 재촉했다. 동희는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고 흰색 가운을 걸쳤다. 등산 바지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색하지도 않았다.

드림캐리어 연구원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의사 두 사람이 빈 휠체어를 밀고 오는 것을 보았다.

“노동호 환자, 지금 물리치료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휠체어를 밀던 의사가 경찰관에게 말했다.

“이 시간에요?” 경찰관은 그렇게 말하며 힐끔거렸지만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의사 한 명은 동작이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웠지만 경찰관은 눈치채지 못했다. 입원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감시 대상 환자를 지키는 임무는 형식적인 교대 근무로 변해있었다. 잠시 뒤 희권과 동희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노동호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실을 나왔다. 경찰관은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켜고 이들을 뒤따랐다. 휠체어가 물리치료실 앞에서 멈췄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희권이 말했다.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탄 휠체어가 물리치료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경찰관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노동호 님, 얼마 전 저에게 하신 말씀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줄 수 있으세요?” 희권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물리치료실에는 이들 세 명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예.” 드림캐리어 연구원 노동호는 순진한 아이 같았다. 고분고분했다.

“폭바해요. 망에 펑!”

노동호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희가 희권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말을 마친 노동호는 동희의 팔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동희가 걸친 가운은 소매가 짧았다.

“폭발한다는 말이지요? 망에, 통신망에?”

“예, 예.”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희권과 노동호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를 끝낸 희권이 통역하듯 내용을 정리했다.

“칩이 통신망에 반응한다는 뜻인 것 같아. 실험실에서 칩이 강한 전자기장에 노출되면 폭발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군. 소똥할매? 이건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프로그램이 칩에 적용되면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다는군. 이건 쫌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리 같긴 하다.”

“진짜예요. 진짜예요”

노동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동희는 파란 하늘과 초록 공원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듣던 칠오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칫 잘못하면 저희들만 억울한 희생양이 되는 거예요. 그 사이 누군가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겠죠.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요.”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자신은   없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소통 헬멧 프로그램을 누가 해킹했는지 밝혀진 게 있나요?” 동희가 처음으로 노동호에게 말을 걸었다.

“팀장님이 그렇다고 했어요.”

“팀장님이 누군가요? 한칠오 팀장님?”

“……”

몇 차례 되물었지만 노동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희 질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동희 소매 자락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집 속으로 숨어버린 달팽이 같은 환자와 더 이상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두 사람은 노동호를 다시 병실로 데려갔다. 병실에는 간호사 한 명이 주사기가 놓인 트레이를 들고 서 있었다. 동희를 힐끔거렸다. 간호사와 몇 마디 주고받은 희권이 동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우리도 주사약 만들었는데.” 자신에게 주사를 놓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 노동호가 말했다.

“아, 그래요.” 간호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병실을 나온 동희와 희권은 복도 끝,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도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교회 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십자 모양 붉은빛이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요 며칠 동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더라고. 초반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기록이라도 해둘걸 그랬어. 이젠 저 말만 반복해서 하네. 기억력 장애도 함께 온 것 같아. 예전 기억을 거의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내일쯤 노동호 담당 정신과 선생과 이야기해볼게. 무언가 기록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판단은 네가 해라, 저 환자가 하는 말의 진위여부 말이야.”


아직 일이 남은 희권은 동희만 먼저 오피스텔로 보냈다.

“망에 팡!” 동희는 병원을 나서는 내내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자신의 언어까지 잃어버린 노동호를 생각했다.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는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병원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곰곰이 따져보면, 망각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소중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잊힌다는 것!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의식은 남고 본능에 따라 또 다른 이들과 절대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 어쩌면 망각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일 수 있었다. 인간이 목숨까지 걸고 하는 사랑의 맹세가 허무한 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미 없는 행위가 윤회처럼 무한 반복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머릿속이 찌릿찌릿해졌다. 잠들어 있던 무서운 감정이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았다. 동희는 머리를 흔들었다. 애써 지금 생각을 지우려 했다.

“미제레레! 미제레레!”

동희가 성모상을 지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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