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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Mar 31.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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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응천은 두 번째 낭트 여행을 위해 고속열차에 올랐다. 이번에 그들은 커다란 가방을 가져갔다. 그 가방에는 매그니토 헬멧처럼 생긴 물건이 2개 들어 있었다. 나오미와 앙리는 첫 만남에서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었다. 나오미의 짧은 불어와 앙리의 어눌한 언어로는 무리였다. 앙리가 앓고 있는 신경계 질환은 단순한 입놀림 마저 힘겹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가끔씩 눈물 흘리는 것으로 면회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세세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오미는 돌아오자마자 소통 헬멧부터 챙겼다. 형태는 대량 생산된 DC-005 ESP Painter, 퍼펙트 드로잉 헬멧과 동일했지만 소통 헬멧용 칩이 내장된 연구용 최초 모델이었다. 비록 시제품이었지만 나오미는 이 프로토타입을 가장 아꼈다. 칠오만 아니었다면 이 제품이 퍼펙트 드로잉 헬멧 후속으로 출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람들은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회사 운영을 위해 칩 개발이 우선이라는 칠오 주장에 밀렸다. 결국 소통 헬멧 개발은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멈췄다. 커다란 가방에 든 2개의 소통 헬멧 프로토타입으로 아빠와 진정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곧 60살이 되는 남자가 파자마 차림으로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난감 헬멧을 쓴 모습은 볼만했다. 헐렁한 헬멧이 머리통 한쪽으로 돌아가 삐딱하게 치우친 모습은 나오미를 웃게 만들었다. 헬멧을 쓴 그녀 모습도 앙리 눈에 우습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소통 헬멧을 쓰고 마주 앉았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않았다. 응천의 눈에 두 사람은 오래전에 했어야 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야 할 그녀가 이제야 그때 못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젊은 아빠는 늙어버렸고 어린 딸은 훌쩍 커버렸다. 응천의 가슴 깊은 곳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딸과 아빠는 말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헬멧이 앙리의 뇌파를 읽어 나오미에게 열심히 전달했다. 앙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얼마 되지 않아 헬멧이 뜨거워졌다. 헬멧 무게도 점점 앙리를 짓눌렀다. 고개 가누기를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앙리 표정으론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헬멧의 기능은 대단했다. 나오미는 소통 헬멧을 통해 전달되는 아빠 이야기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림캐리어사가 개발한 하나뿐인 소통 헬멧 시제품은 어쩌면 오직 이 순간, 이 두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오미는 자신들 작품이 자랑스러웠다.

나오미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미지는 곧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그 문장이 자신의 생각인 양 입술을 실룩이며 천천히 읊조렸다. 순간 그녀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장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떠난 이유를 하소연하고 있었다. 외조부였다! 앙리를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떼어낸 것은 그녀 외조부였다. 외조부는 처음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병에 걸린 것을 구실로 외조부는 마침내 그를 쫓아낼 수 있었다. 나오미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동시에 외조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나오미의 분노를 감지한 앙리는 당황했다. 앙리의 당황함이 다시 나오미에게 전해졌다. 앙리가 서둘러 딸을 진정시키려 했다.


‘나오미, 그를 용서해야 해. 증오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앙리가 생각했다. 나오미의 분노가 슬픔이 되어 녹아내렸다. 그때 앙리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짧고 강렬한 통증이었다.


“아!”

앙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린 송아지 울음에 가까웠다. 헬멧을 벗으려 힘겹게 몸부림쳤다. 응천이 재빨리 일어나 앙리 머리에서 헬멧을 벗겼다. 나오미가 앙리 손을 잡아주었다. 호흡이 가빴다. 아직 눈동자가 놀란 모습이었다. 서서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얼굴에 다시 미소가 스몄다. 딸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가 잡고 있는 자신 손에 힘을 꼭 주었으나 나오미는 느끼지 못했다. 소통 헬멧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라 꼬뮤니까시옹.”

소통 헬멧을 벗은 무슈 앙리가 늘어진 성대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가며 몇 차례 반복했다. 마치 꼭 해야만 하는 말처럼.

비록 소통 헬멧을 통해 읽은 생각은 아니지만 나오미는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아빠의 의도를 알았다. 오랜 세월 앙리는 자신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자책하며 살아왔다. 이젠 슬픔도 외로움도 분노도 기쁨까지 하나의 감정으로 뭉뚱그려졌다. 어떤 감정이든 고통을 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단어에는 자신의 비정함을 넘어서 진심을 알아 달라는 투정이, 호소가, 소심한 암시가 담겨있었다. 아무런 연락도 할 수 없고, 진심을 알릴 소통도 없는, 벽으로 둘러 쌓인 삶을 살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아빠는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도 모를 이 순간을 기다리며 이 말을 준비해왔는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느낀 억울함과 비겁함을 해명할, 자신의 기구한 삶을 대변할,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할 단 하나의 단어!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아빠를 원망하고 증오하며 살아왔다. 나오미는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빠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인생도 엄마만큼 가련했다.

 

해는 어느 때보다 빨리 지고 있었다. 앙리가 창 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나오미가 휠체어에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응천이 달려와 거들었다. 가느다란 앙리 다리가 부들거렸다. 세 사람은 천천히 창가로 갔다.

아빠에게 칩을 시술한다면 증세가 나아질까? 물론 부작용을 일으키는 기능은 빼고. 그럼 칩이 제대로 작동은 할까? 그렇다 해도 그것을 위해 아빠는 정밀 검사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아마 한국에선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빠가 건강해진다면…… 나오미 머릿속이 앞으로 있을 계획들 채워지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사업체 대표 따위는 집어치울 것이다. 아빠를 위한 칩 하나만 빼고 칩 개발은 다시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를 위한 칩도 필요치 않을지 모른다. 모든 칩은 위험하기만 할 뿐…… 아빠를 건강하게 만들 다른 시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덩달아 드림캐리어의 모든 사업을 끝내리라. 대신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무언가 그들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빠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조만간 외조부에게 따질 것은 따질 것이다. 물론 그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응천이 이 모든 것에 뜻을 같이 해준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햇살이 그녀 시선을 찔렀다. 눈을 찡그렸지만 마음은 한결 환했다. 잡고 있는 아빠 손에서 온기를 느꼈다. 손을 더 꽉 쥐었다.


겨울 낭트 외곽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나오미와 응천의 부축을 받은 앙리는 창가에 바짝 다가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였다. 나오미는 성탄 선물을 미리 받는 기분이었다. 아빠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지금까지 받아본 어떤 선물보다 소중했다. 비록 불쌍한 엄마는 없었지만.

바닥에 실루엣 셋이 길게 드리웠다. 세 사람은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앙리에게 크리스마스 전에 오겠다는 말을 마치고 나오미와 응천은 요양소를 떠났다. 콧수염 기사의 택시가 요양소를 떠나 낭트 역으로 향했다. 벌써 4번째 같은 택시를 탄 나오미와 응천은 자잘한 ‘인생역정’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며칠 내로 다시 올 거예요. 어쩌면 크리스마스이브가 될지도 몰라요. 괜찮을까요?”

택시가 낭트 역에 도착했을 때 나오미가 기사에게 말했다.


“위! 물론이죠, 마드모아젤을 위해서라면 크리스마스에도 일할 겁니다!”

기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친밀함을 표현했다. 택시에 내려 멀어지는 나오미와 응천을 향해 소리쳤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마드모아젤, 웃는 모습이 예쁜 마드모아젤, 항상 웃음을 잃지 말아요. 제가 모두 다 잘 될 거라 했죠? 두 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그새 코가 빨개진 택시 기사를 돌아보며 나오미가 큰소리로 외쳤다.


“주와이유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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