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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Mar 30.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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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TGV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부딪친 빗물이 대지와 평행한 물길을 그렸다. 비는 금방 그쳤다. 구름 사이로 나타난 해가 들판을 초록으로 바꾸었다. 뒤쪽에 흐릿한 무지개가 푸른 하늘과 안개 낀 땅을 이었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동화 속 세상으로 빨려 드는 것 같았다. 나오미는 마법에 빠져 오랜 세월 아빠와 헤어져야만 했던 공주가 되었다. 설렘도 잠시, 곧 불안이 솟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을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대화가 통하기나 할까? 몸은 많이 아픈 걸까? 찾아가는 잠깐 사이 또 사라지지는 않겠지?’


현실성 있는 걱정과 현실성 없는 우려가 뒤죽박죽 섞이면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동화로 구성하려던 나오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응천은 그런 마음을 읽은 듯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눈치 없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그녀를 향한 배려심은 누구보다 깊었다.


2시간 정도 달린 TGV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오미와 응천은 낭트라 적힌 역 앞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요양원 주소를 보여주었다. 기사는 대답 대신 콧수염을 빙긋 추켜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핸들을 잡은 통통한 손이 이끄는 대로 택시는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기사는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너스레를 떨었다. 멋쩍어하는 응천과 달리 나오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드모아젤, 돈 워리 투 머치. 에브리띵 윌 비 파인.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게 잘 될 겁니다.)”

백미러를 통해 나오미를 힐끔거리던 기사가 프랑스 억양이 깃든 영어로 말했다.


“두 아이 룩 워리드? (제가 근심에 찬 것처럼 보이나요?)”

창 밖을 보던 나오미가 조금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나우 유 룩 베터. (웃으니깐 훨씬 좋은데요.) 웨어 아유 후롬?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이번엔 응천을 보고 말했다.


“코리아.”


“꼬레? 오!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대체 그게 다 뭐였죠?”

나오미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좋은 화젯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화제를 바꾸려 했다.


“모든 것들이 잘 해결되길 빌게요. 하지만 꼬레가 아름다운 나라라는 걸 압니다.”


“한국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응천이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기사가 재빨리 입을 놀렸다.


“농! 하지만 저의 큰아버지는 가 본 적 있죠. 한국전쟁 때 참전했거든요. 늘 서울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겡복구?”


“경복궁!”


“위, 위! 맞아요. 큰아버지의 부대가 미군들과 함께 서울에서 작전을 펼쳤요. 프랑스군은 원래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큰아버지가 속한 분대 서울에미군과 합류했요. 겡복구 부근을 정찰하면서 궁 내부까지 걸어 들어갔답니다. 혼자서 소총만 든 채 텅 빈 궁 내부를 휘휘 휘젓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꽤나 인상적이었던지, 큰아버지는 어린 우리를 볼 때마다 당시 무용담과 함께 궁전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요. 오! 제 큰아버지도 말년을 지금 가시는 그 요양원에서 보냈답니다.”


“아, 네.”


“생 라파엘 요양원이 오래되긴 했지만 시설도 잘 유지되고 직원들이 친절한 편입니다. 그 점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로 그곳에 가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아빠가 계세요.”


“오! 위, 위, 그렇군요!”

머나먼 꼬레에서 온 사람들이 프랑스 요양원에 있는 아빠를 찾다니? 호기심이 발동할 법도 했지만, 대답을 마치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는 나오미의 모습을 본 눈치 빠른 기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이곳, 낭트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어디 가면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지, 맛있는 음식은 어디서 먹을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낭트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사용하는 영어 어휘의 한계로 소통이 매끄럽지 못했다. 대신 백미러로 자신의 승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콧수염이 올라가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평생 악의 없이 살아온 재치 있는 50대 후반 택시 기사가 마침내 요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사는 요양원을 나설 때 차를 잡지 못하면 연락 달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요양원 입구에 들어서자 빨간 산타 모자를 쓴 직원이 나오미 일행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마르고 키가 큰 직원은 이들이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는 내내 옆에 앉아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면회신청을 마치자 나오미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쿵쾅거렸다. 애써 눌러 놓은 수많은 감정이 동시에 솟아올라 하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퉁퉁한 중년의 간호사가 나오미와 응천 안내했다.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은 나오미에게 그녀 자신이 외부인임을 상기시켰다. 순간순간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자신을 이곳으로 오라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진이 있고 주소가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제야 다짜고짜 찾아오라는 뜻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혹시 나를 만나기 싫어하면 어쩌지? 왜, 어떻게 왔느냐고 화를 내면 어쩌지?’


나오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오미가 긴장한 것을 눈치챈 응천이 축축한 그녀 손을 잡아주었다. 그때 중년 간호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오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앙리 씨가 머무는 방입니다.”


간호사는 문을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 문을 열자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힘겹게 외출복 상의를 목까지 끼운 남자는 옷을 마저 내릴 생각은 않고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벗은 남자 등이 보였다. 앙상한 등뼈가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방에 들어온 도 모르고 멍하니 창 밖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대기를 뚫고 나뭇잎에 부딪친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냈다. 이곳은 겨울에 비가 잦았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자 나오미는 다시 울적해졌다.


“무슈 앙리, 무슈 앙리!”

간호사는 덩치에 비해 목소리가 작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앙리가 간호사를 보고 미소 지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외출복을 마저 입혀주었다. 택시 기사의 미소, 키 큰 산타 모자의 미소, 중년 간호사의 미소, 조금 전 복도를 지날 때 마주친 청소기를 움직이던 미소, 그리고 파자마 하의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은 무슈 앙리의 어색한 미소까지! 낭트는 미소 천지였다. 나오미는 자신이 초라해 느꼈다. 눈물이 글썽였다.


“무슈 앙리, 따님이 오셨어요!”

간호사의 고개를 따라 앙리가 시선을 돌렸다. 무슈 앙리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눈이 짝짝이로 커졌다. 덩달아 천천히, 힘겹게, 허공을 향해 손을 뻗쳤다. 손을 따라 몸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부녀는 한동안 눈빛만 주고받았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앙리였다. 앙리는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를 가리켰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자랑스레 보여준 액자였다. 남산타워가 보이고, 자신이 젊은 여자와 함께 있고, 그들 아래 작은 여자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는 사진을 담은 액자였다. 찡그린 아이를 가리키는 앙리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고개를 들어 나오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무릎 꿇고 아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빠와 딸이 비로소 만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30여 분간 30년 가까이 참아온 눈물을 쏟아냈다.

울음이 그치자 어색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오미가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했을 때 앙리는 얼굴을 숙이고 조용히 몸을 떨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나오미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앙리의 우는 모습이 낭트의 겨울비 같았다. 자신을 버린 무심한 부정을 향해 조금은 원망스러운 말을 내뱉을 법도 했지만, 앙리 모습에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무슈 앙리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어색했다. 그의 질병이,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앙리는 가끔씩 응천과 눈이 마주칠 때도 미소를 잊지 않았다. 응천은 요양원에 도착한 이후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무얼 해도 어색하고 어정쩡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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